[이상헌 기자의 C'est la vie] 최홍기 대구현대음악오케스트라 대표

입력 2021-04-22 17:18:24 수정 2021-04-22 19:17:26

십수년째 지역 주민·청소년을 위한 음악 교육 '한국판 엘 시스테마' 매진
청소년쉼터 학생들과 독도 연주회…"음악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어"

최홍기 대구현대음악오케스트라 대표가 21일 대구 남구 봉덕동 작업실에서 대나무 피리의 일종으로 지난해 특허를 받은 악기
최홍기 대구현대음악오케스트라 대표가 21일 대구 남구 봉덕동 작업실에서 대나무 피리의 일종으로 지난해 특허를 받은 악기 '홍기'를 만들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imaeil.com

카리브해에 접한 남미 국가 베네수엘라는 우리에게 다소 낯선 나라다. 얼핏 떠오르는 이미지가 썩 밝지는 않다. 석유 생산에만 기댄 포퓰리즘 정치의 끝판왕, 연간 물가상승률 3천%에 육박하는 초인플레이션, 한 나라에 두 명의 대통령이 존재하는 심각한 분열….

하지만 베네수엘라는 한때 각국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마약·폭력 등에 노출된 아이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했던 '기적의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El Sistema·시스템이라는 뜻의 스페인어)였다. 미국 LA 필하모닉을 이끄는 세계적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그 대표적 수혜자로 유명하다.

물론 베네수엘라의 경제 위기가 계속되면서 엘 시스테마 역시 위상이 많이 추락했다. 그러나 최홍기(56) 대구현대음악오케스트라 대표의 한국판 엘 시스테마는 여전히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음악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그의 간절함이 원동력이다.

"청소년쉼터 학생들에게 색소폰을 가르쳐왔는데 다음달 독도에서 연주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그래서 요즘 '홀로아리랑', '독도는 우리 땅'을 맹연습하고 있어요. 다들 독도는 처음 가보는 터라 기대가 아주 크답니다."

그는 몇 년 전에는 쉼터 청소년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노래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아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노랫말로 만들면 작곡가들이 곡을 썼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대구청소년문화의집에서 공연했다.

최 대표가 열악한 환경에 놓인 청소년들에 대한 음악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무렵이었다. 지인의 부탁으로 경북 청도군 방지초교 문명분교(2018년 페교)에서 리코더 교실을 7년 동안 열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까지 나서서 바이올린, 플루트 등을 가르쳤고 주민과 운문사 스님, 오케스트라가 함께 참여한 가운데 '산 속 음악회'를 열었다.

"처음 학교에 간 날 웬 꼬마녀석이 저에게 다짜고짜 욕을 해서 엄청 놀랐지요. 알고 보니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마음의 문을 걸어잠근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학생이 음악을 배운 뒤로는 학교에서도 손꼽히는 모범생이 됐어요.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손편지를 보내와 남 몰래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납니다. 허허허."

계명대 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한 그는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 또한 남다르다. 대구 남구 물베기마을 문화예술축제사업의 산파 역할을 맡아 성공적으로 행사를 추진했고, 현재 물베기마을협동조합 이사장도 맡고 있다. 물베기는 대명2동 1823번지 주변의 옛 자연부락 이름이다.

"음악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인근 주민들의 소음 민원이 많았습니다. 어르신들께 자장면을 대접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의했더니 연주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다행히 반응이 좋아 매주 공연하게 됐고 중국집 사장님, 동네 상인들도 후원해주셨습니다. 나중에는 문화관광부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에 선정돼 주민들에게 악기를 가르쳤고 밴드, 합창단, 오케스트라까지 구성되면서 축제로까지 이어졌죠."

10여 년 전부터 대구지하철 명덕역 입구에서 매월 28일 2시 28분부터 28분간 공연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이디어는 폴란드 쇼팽음악원 유학 경험에서 찾았다. 몽고의 침략을 알리다 죽은 나팔수를 기리는 어느 성당의 공연이 한국 민주화운동 효시로 평가받는 2.28민주운동을 시민들에게 더욱 널리 알리자는 기획으로 이어졌다.

그가 1997년 창단한 대구현대음악오케스트라는 국내에 몇 안되는 사회적기업 오케스트라(2009년 인증)이다. 25명에 이르는 단원은 모두 음대를 졸업한 전공자들이다. 국내 작곡가들의 창작곡을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거의 유일한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

"물론 아파트단지, 학교, 기관·기업체 초청으로 공연할 때는 트로트, 가요도 연주합니다만 저희가 주로 선보이는 곡들은 일반인들이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음악입니다. 그래서 단원들이 적어도 4대 보험 혜택은 받게 해주자, 생계 걱정은 하지 않도록 해주자는 취지에서 사회적기업으로 변신했지요. 당연히 사회적기업으로서 역할에도 충실하고요."

코로나19로 연간 수십 차례에 이르던 오프라인 공연이 거의 중단된 터라 많이 답답하겠다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사진, 수석, 분재 등 '취미 부자'인 그답게 악기 제작으로 한가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청소년들을 위한 융합교육 일환으로 창안해 지난해 특허까지 받은 피리를 닮은 악기의 명칭은 그의 이름과 같은 '홍기'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음악입니다. 코로나19가 어서 끝나 좋은 음악을 시민들께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요. 제 마지막 꿈이 전국 분교 음악회를 여는 것인데 그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준비하고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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