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의 한시산책] 구름 샘을 희롱하던 - 일연

입력 2021-04-03 06:30:00

달빛 아래 오고 가며 구름 샘을 희롱하던 相過踏月弄雲泉(상과답월롱운천)

두 스님 그 풍류가 몇백 년 전 일이던가 二老風流幾百年(이로풍류기백년)

골 가득한 연하 속에 옛 나무는 아직 남아 滿壑烟霞餘古木(만학연하여고목)

고개 숙인 찬 그림자 나를 맞는 시늉이네 偃昂寒影尙如迎(언앙한영상여영)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연주할 때마다, 유일한 지기(知己)였던 종자기(鍾子期)는 곡조에 담긴 백아의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맞혔다고 한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거문고 줄을 딱 끊어버렸다. 한문 문화권에서 우정의 상징적 모델로 단골 등장하는 저 유명한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다.

하지만 서구의 칼라일과 에머슨의 만남이 아무래도 조금 더 격이 높지 싶다. 그들은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뒤 30분 간 상대방을 뻔히 쳐다보다가, 이런 말을 하고 헤어졌다 한다.

"오늘 참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백아와 종자기 사이에는 거문고 소리라는 매개라도 있었지만, 이 두 사람의 경우는 그 어떤 매개물도 없는 그야말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교감이다. 그러나 그들과는 차원 자체가 아예 다른 만남도 있다.

신라 때다.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스님이 대구의 비슬산에 숨어 살았다. 관기는 남쪽 산봉우리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 도성은 산 북쪽에 있는 굴에서 살았다. 그들은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면서 매양 서로 오고 가고 했다. 도성이 관기가 그리워지면, 산속에 있는 나무들이 관기가 있는 남쪽을 향해 일제히 고개 숙여 절을 하면서 맞이하는 듯한 몸짓을 지었고, 관기가 도성을 그리워할 때는 나무들이 도성이 있는 북쪽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슬산 나무들의 몸짓을 보고 그리운 도반을 찾아가는 우정의 향연을 벌이곤 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위의 시는 두 스님의 풍류가 넘치는 우정을 찬양하는 한편, 시대를 초월하여 그 우정의 향연에 동참하고 싶어 했던 저자 일연(一然)의 작품이다. 보다시피 이 두 스님의 사귐은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이심전심이 아니라, 비슬산의 나무들까지 함께하는 자연합일(自然合一)의 우주적 교감이라 할 수 있다. 이 엄청난 교분을 어디서 달리 구할 수가 있으랴?

지금 관기와 도성이 오고 가던 비슬산 일대에, 참꽃이 불을 질러 한바탕 불바다를 이룰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4월 중순 절정기가 되면,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리라. 하지만 이제 참꽃만으로 사람들을 끌려 하지 말고, 두 스님의 세계적인 우정을 감동적인 문화콘텐츠로 승화시킨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닐까 싶다. 혹시 묘안이 없는가 몰라.

이종문 시조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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