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꼽히는 농촌문제 전문가…2019년부터 의성 안계면에서 인생 삼모작
'어떻게 하면 농촌이 나아질까' 평생 화두 "사람 마음 얻어야 지역소멸 막아"

2019년 2월 어느 날 초로(初老)의 한 사내가 한적한 시골인 경북 의성군 안계면 위양2리에 전입신고를 했다. 요즘 뜨거운 이슈인 비공개 정보를 이용한 땅 투기와는 거리가 먼, 생계형(?) 이주였다. 고(故) 박경리 선생이 쓴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태생인 그에게 의성은 그저 낯설고 물설은 땅이었다.
타고난 붙임성 덕분인지 다행히 그는 금세 마을 어르신들과 친해졌다. 종종 어울려 화투 놀이도 즐기는 사이가 됐다. 퇴근할 때면 마을 어귀에서부터 "미나리 먹고 가시라", "갓 담근 김치와 수육 있으니 소주 한 잔 하고 가게"라는 초대가 이어진다.
그런데 백발 성성한 이 남자의 이력서는 범상치 않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한국판 뉴딜 자문위원, 농림축산식품부 정책연구용역 심의위원, 재단법인 지역재단(2004년 설립) 이사 등 주요 경력이 한 페이지를 훌쩍 넘어간다. 경제학 박사인 유정규(63) 의성군 이웃사촌지원센터장의 이야기다.
"원래는 40년 서울 생활을 마무리하고 오랜 지인들이 있는 영천시 자양면으로 귀촌할 계획이었습니다. 의성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는데 마침 제가 관심 있는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영천이나 의성이나 뭔 차이가 있겠나 싶어 왔지요. 의성마늘 못지않게 안계쌀이 유명하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유 센터장은 대학원 시절부터 농촌 문제에 매달려왔다. 대학 강단에도 서긴 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현장에서 보냈다. 행정 공부를 위해 전북 진안군청 군정기획평가단장, 서울시 지역상생교류사업단장으로 일한 경험도 있다.
그가 인생 삼모작 터로 삼은 이웃사촌지원센터는 경상북도와 의성군이 추진하고 있는 '이웃사촌 시범마을사업'의 민·관 협력 중간지원기관이다. 주민 원탁회의, 마을살림꾼 양성, 공동체사업 지원, 도시청년 유치 네트워킹 등이 주요 활동이다. 10여 명의 직원이 '청년이 찾는 안계, 지속가능한 의성'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이웃사촌 시범마을은 일자리, 주거 환경, 생활 여건, 마을공동체가 두루 갖춰진 새로운 형태의 마을을 목표로 한다. 동서로 길쭉한 의성군 서쪽 7개 면의 중심지인 안계면 일원에서 다양한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청년농업인 스마트팜 교육, 출산통합지원센터·의성펫월드 개원, 면소재지 도시재생 등이다.
특히 경북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처음 시도한 '의성 살아보기' 프로그램이 눈길을 끈다. 만 39세 이하 청년들이 10주(올해는 12주) '청춘구 행복동' 체험을 통해 미래 비전을 찾는데 반응이 뜨겁다. 1기에는 15명 모집에 75명, 2기에는 115명이 지원했고 참가자 절반이 안계면에 남아 창업을 했거나 준비 중이다.
"아시다시피 의성은 인구소멸 위험이 아주 높은 지역입니다. 그런 점에서 경상북도와 의성군이 젊은 층이 들어올 만한 여건 조성을 민선 7기 역점시책으로 정한 데 대해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전국의 많은 지자체가 당근책으로 인구 유입을 꾀하지만 돈 주고 주민 늘리기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핵심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인구 4천500여 명에 불과한 안계면의 분위기는 서서히 바뀌고 있다. 대부분 외지 출신인 청년들이 골목 곳곳에 농산물 판매점, 갤러리, 레스토랑, 수제 맥주 공방 등 개성 있는 공간을 앞다퉈 선보이면서 과거와 달리 해가 져도 인적이 끊이지 않는다. 거의 매일 가장 늦게 퇴근하는 유 센터장도 이들과 소주 한 잔 나누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의성군 역시 전국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중앙정부의 다(多)부처 협력사업 현장 토론회가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고, 벤치마킹을 하겠다는 타 시·군의 요청 또한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하면 농촌이 나아질까'라는 유 센터장의 평생 화두에 대한 답도 보이는 듯 하다.
하지만 그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언젠가 자신이 떠나더라도 경상북도와 의성군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새로운 사업에 대한 원주민들의 수용력이 기대만큼 충분하지는 않아 이들에 대한 설득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역대 정부에서 돈을 아무리 써도 농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사람'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신 영농기술을 가르치고, 농기계를 지원하는 데 그쳐선 혜택을 본 일부의 호주머니만 불어납니다. 주민 스스로가 마을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역량을 키우는 지역 리더 교육이 절실한 이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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