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기의 필름통] 스파이의 아내

입력 2021-03-26 06:30:00

영화 '스파이의 아내' 중 한 장면
영화 '스파이의 아내' 중 한 장면

"당신이 스파이라면, 저는 스파이의 아내가 되겠어요."

일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가 25일 개봉했다. 제목으로는 일본풍의 가벼운 코믹 멜로를 연상시키지만, 이 영화는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를 소재로 한 멜로 서스펜스다. 어두운 과거를 외면하는 일본의 풍토에서는 보기 어려운 소재이기에 '파격적'인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배경은 1940년 일본 고베. 태평양전쟁 발발 전 일본은 대동아 신질서 건설이란 망령에 휩싸여 있다. 곧 화염에 휩싸일 듯 불쏘시개 같은 세상과 달리 풍요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부부가 있다.

무역상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와 그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 유사쿠는 고급 양복과 위스키를 즐기는 신식 자본가이고, 사토코는 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소녀 같은 감성의 아내다.

어느 날 남편이 만주로 출장을 떠난다. 그리고 돌아온 남편이 수상하다. 혹시 새로운 여자가 생긴 걸까. 남편의 주위를 서성이던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만주에서 일본군이 병균으로 인간을 생체실험 했고, 수많은 주검을 보았으며 그 증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증거를 미국으로 가져가 폭로하려는 계획까지 밝힌다.

'스파이의 아내'는 NHK에서 방영된 드라마를 영화로 옮긴 것이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후보작이자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J-호러의 중심에 있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첫 시대극이다. 그는 '큐어'(1997), '회로'(2001), '절규'(2006) 등 기요시 3부작을 내면서 J-호러의 거장으로 불리던 감독이다. 일본 현역 감독을 통해 731부대의 끔찍한 만행을 엿본다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영화 '스파이의 아내' 중 한 장면
영화 '스파이의 아내' 중 한 장면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을 보여주는 영화 중 하나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1976)이다. 포르노에 가까운 노출로 유명했던 바로 그 영화다. 욕정과 섹스에 몰입한 한 남자를 통해 감독은 군국주의에 대항할 수 없었던 시대의 무기력을 은유한다.

그를 잘 보여주는 것이 거리를 행진하는 일본군의 모습이었다. 다다미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뤄지던 은밀한 스토리가 일본군의 위용에 짓눌린 주인공의 시대적 한계로 발전되는 장면이다.

'스파이의 아내'도 몇 차례 일본군들의 활보 장면을 보여준다. 제작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바람에 교묘한 카메라워크로 만회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는데, 흥미롭게도 '감각의 제국'과 흡사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스파이의 아내'는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고, 시대에 저항한다.

영화는 세 캐릭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부부와 함께 아내의 소꿉친구였던 타이지(히가시데 마사히로)가 헌병대 대장으로 오면서 세 인물의 갈등으로 커진다.

코즈모폴리턴으로서 '만국인'임을 자처하는 유사쿠는 자국의 비인간적 만행을 세계에 알리려 하고, 타이지는 일제의 선봉에 선 군인으로 이를 막으려 한다. 사토코는 안락한 삶을 포기해야 할 위기에서 고뇌에 빠진다.

기요시 감독은 사토코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남편의 품안에서 행복에 겨워하던 아내가 서서히 세상을 알아가게 되면서 세 사람의 밀고 당기는 갈등이 긴장감을 높인다.

영화 '스파이의 아내' 중 한 장면
영화 '스파이의 아내' 중 한 장면

영화 초반 유사쿠는 아내를 주인공으로 한 짧은 영화를 제작해 몇 차례 상영회를 갖는다. 아내가 금고의 비밀 서류를 꺼내고, 남편이 그의 아내에게 총을 쏘는 장면이다. 구슬픈 가사의 일본 노래가 깔리는, 독일 표현주의적 기법에 오손 웰스 주연 '제3의 사나이'(1949)를 연상시키는 단편영화다.

이 영화의 옛 연기 톤처럼 '스파이의 아내'는 사뭇 연극적인 느낌으로 그려진다. 대형 군중신이 필수인 시대극이지만, 한정된 공간에 머물며, 캐릭터들의 대사 또한 연극적인 톤이다. 배경은 물론이고, 음악까지 고전적이다. 연출적 의도일까 아니면 제작비의 한계에서 오는 궁여지책일까.

'스파이의 아내'는 치명적인 생체실험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참극이 자행된 역사는 분명하다고 말한다. 이를 기록영상과 사진, 손으로 쓴 노트를 통해 도큐먼트화 한다.

일본의 극우성향이 갈수록 심해지는 요즘, '스파이의 아내'는 감독의 시대의식과 일본영화의 고전적인 맛, 극적 반전까지 느낄 수 있는 영화다. 116분, 12세 관람가.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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