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봄날의 아기 곰

입력 2021-03-24 11:24:18

리우 영상설치작가
리우 영상설치작가

땅이 푹신푹신해지고, 물기가 배어나오면 산수유, 매화, 목련이 피고, 분분한 바람엔 온기가 더한다. 산꼭대기 눈과 얼음이 녹아 흐르고, 땅속에선 개구리, 지네, 도롱뇽이 나오고, 나뭇잎 사이, 죽은 가지 틈새마다 숨어있던 온갖 벌레들이 기지개를 켠다.

겨울잠을 자던 곰은 수척한 몸으로 어슬렁어슬렁 굴을 빠져나오고, 그 뒤를 쫄래쫄래 아기 곰이 따라 나온다. 새까만 아기 곰은 장난기 가득한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손바닥 같은 발바닥으로 아장아장 걷는다. 숲속 공터 햇살 좋은 곳에서 봄볕을 듬뿍 받으며 나른한 몸을 추스르는 곰 모자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세상이 낯설다. 아기 곰은 뒹굴고, 깨물고, 얼굴을 비비며 치명적인 귀여움을 발산한다. 봄은 그런 것이다. 아지랑이 겨드랑이 간질간질 하는 것.

그러나 봄은 긴 설국의 터널을 지나야 온다. 요즘이야 손쉬운 난방으로 따뜻한 겨울을 나고, 반팔 티셔츠 하나로 실내 생활을 한다지만, 옛사람들에게 겨울은 혹독했을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움집 생활을 하던 초기 인류의 겨울을 상상해 보면, 긴 겨울을 견뎌낸 그들에게 봄은 거의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아니었을까. 봄이 반드시 온다는 확신이 없던 그들에게 마침내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을 때의 감동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봄날 아기 곰은 그렇게 새롭게 시작되는 생명의 기쁨을 온 몸으로 표현한다.

옛 사람들의 눈에 곰은 어떻게 비쳤을까. 숲의 지배자였던 곰은 추운 겨울이 오면 동굴에 들어가 꼼짝 않고 엎드려 죽는데, 놀랍게도 봄이 오자 죽었던 곰이 환생하여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러니 그들에게 곰은 재생과 부활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곰은 그렇게 죽었다 깨어난 신성한 동물이 된다. 봄의 새로운 생명, 기쁨과 부활, 새 생명의 움틈은 겨울잠에서 깬 곰과 함께 온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 지역의 신화나 설화에는 곰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곰이 동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고 인간이 되었다는 단군신화나, 곰의 몸속에 깃든 신을 하늘로 보내는 아이누 이오만테는 모두 그런 곰에 대한 경외감을 담고 있다. 특히 아이누 족의 아이누 이오만테는 대표적인 곰 신앙 축제이다. 아이누 족은 일본 북쪽 홋카이도와 러시아 사할린, 쿠릴열도 일대에 걸쳐 산 독특한 외모의 털북숭이 소수민족이다. 그들의 이오만테는 일종의 종교행사로 신이 곰의 몸으로 인간세계로 내려왔다는 믿음이 핵심이며, 곰의 몸에 갇힌 그 영혼을 다시 신의 나라로 보내주는 제의다.

봄날의 아기 곰이 그토록 귀여운 이유는 아지랑이처럼 가려운 봄의 전령이기 때문이 아닐까. 지루한 겨울을 견디면 반드시 봄이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안다. 지치지도 않는 아이들의 반복되는 질문처럼 그렇게 봄은 매년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봄은 언제나 기쁨이다. 나도 그렇다. 반백년을 맞이한 봄날이건만, 나는 갈수록 봄이 그립다. 작업실 틈새마다 새들이 세 들기 위해 새집을 짓고, 나는 볼을 비벼대는 봄바람을 맞고 서서, 곧 만발할 벚꽃과, 산마다 진달래와, 안개속의 복사꽃을, 꿈결처럼 그리워하는 것이다.

영상설치작가 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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