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세종대왕은 위대한 음악가였다

입력 2021-03-22 11:26:44

유대안 대구합창연합회 회장
유대안 대구합창연합회 회장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한글을 창제하신 일일 것이다. 세종은 백성들이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누구든지 익히고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한글을 만들었다. 오늘날 한글은 그 원리나 형태가 과학적이며 쉽고 편리하여 세계에서 우수한 글로 평가되고 있다. 세종은 한글 창제뿐 아니라 집현전을 설치해 학자를 양성하고 과학을 장려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여러 분야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심지어 세종은 음악 분야에도 업적을 남겼고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나라에서 사용하는 음악이 정형화되지 않아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향악과 당나라의 당악, 송나라의 아악 등을 혼합해 사용했다. 이를 본 세종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의 공식적인 음악을 아악에 두고 정리하도록 박연에게 지시했다. 박연은 아악에 맞는 악기를 새로 제작하고 제정한 아악을 정월 하례에 처음으로 연주했다. 이 곡을 들은 세종은 박연에게 안장을 얹은 말을 하사할 정도로 흡족해 했다.

세종의 음악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세종이 절대음감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아악을 정리하면서 우리 땅에서 나는 옥돌로 편경을 제작했다. 새로 만든 편경의 이칙음(G#) 소리가 세종의 귀에 조금 낮게 들렸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 신하에게 물었다. 박연이 즉시 가서 살펴보니 편경 가장자리에 먹줄이 남아 있었다.

"먹줄로 그은 부분의 돌을 미쳐 다 갈지 아니하여 소리가 낮습니다"라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석공을 시켜 먹줄 부분을 갈고 나자 비로소 음이 고르게 들렸다. 미세한 소리의 높낮이를 구분하는 것이 보통사람에게는 쉽지 않으나 세종은 미세한 소리의 차이를 알아낼 정도로 정확한 음감의 소유자였다.

세종은 12율관의 기본이 되는 황종율관(黃鍾律管)을 제정하고 우물 정(井)자 모양의 한 칸을 한 박으로 음의 길이를 표시한 정간보를 창안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종은 나라의 임금으로서 우리 음악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컸다.

"아악은 본래 우리 음악이 아니고 중국 음악이다. 중국 사람이라면 평소 이런 음악을 듣고 익숙하여 제사에 연주하는 것이 마땅하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다가 죽어서 아악을 듣게 되니 이 어찌 된 일인가?"(<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세종은 선대 임금께서 살아생전 우리의 음악을 듣다가 돌아가신 후 제사를 지낼 때 중국의 아악을 듣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여겨 종묘제례악을 향악화하여 정립했다.

세종이 몸소 작곡한 정황을 볼 수 있는데 음률에 밝은 임금은 막대기로 땅을 치면서 하루 만에 모든 음악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양에서 지휘의 시작은 막대기로 바닥을 치며 박을 맞추는 데서 출발한다. 이미 세종은 막대기로 지휘하면서 작곡한 것이다.

세종은 종묘제례악에 사용되는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을 만들었다.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으로 만든 여민락(與民樂)은 선율이 웅대하고 화평해 우리 음악 중 으뜸으로 꼽힌다. 이렇듯 세종은 음악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겼고 치세를 누리게 했다. 다시 말해 세종대왕은 위대한 음악가였다.

유대안 대구합창연합회 회장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