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언미의 찬란한 예술의 기억]문체의 사상가, 정점식

입력 2021-03-19 14:30:00

대구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전에 선보이고 있는 정점식-상황(1956)
대구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전에 선보이고 있는 정점식-상황(1956)

대구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 전시 '때와 땅'을 관람하러 갔다가 故 정점식(1917~2009) 선생님의 작품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전시장에 초대된 작가 중 몇안되는 '직접 만났던' 작가이기도 하고, 1950년대 선생님의 작품을 본 게 오랜만이기도 했다. 정점식 선생님은 구상미술 위주의 1940~50년대 대구 화풍에서 추상회화를 개척한 작가다. 또 오랜 세월 대구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며 지역 화단을 이끌었다. 화가로서의 이름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서울 화단으로 진출할 때도 줄곧 지역 화단을 지켰다. 오랜 만에 작품 앞에 서서 그의 존재가 지역 화단에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생각을 더듬어 봤다.

선생님은 계성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4년부터 계명대에서 제자를 길러냈다. 정년퇴임한 1983년 이후에도 2001년까지 강의를 계속했다. 계명대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호 '극재(克哉)'를 따서 이름 지은 극재미술관을 건립 운영하고 있다. 그가 대구뿐만 아니라, 한국 추상회화에 미친 영향은 컸다. 200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고 2009년 작고하던 해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정 선생님은 유년시절 약전골목에서 한의사를 하던 고모부로부터 한문과 국어를 배웠고 일본 경도시립회화전문학교에서 유학했다. 당시 일본에는 큐비즘과 다다이즘과 같은 새로운 사조가 유입되었는데 그도 그런 경향에 관심을 쏟았다. 1941년 귀국했다가 삼촌이 살고 있던 북만주 하얼빈으로 거처를 옮겼다. 넓은 황야를 보면서 시대적 고뇌와 무의식을 캔버스에 표현했고 이따금 하얼빈 거리의 이국적인 풍물을 스케치했다. 아쉽게도 그 시기의 작품들은 전쟁 기간 중 상당 부분 유실됐다.

광복 후 다시 돌아온 대구의 서양화단에는 자연주의 경향의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작품은 이런 경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던 중 6·25전쟁으로 인해 수도권에서 활동하던 많은 예술인들이 대구로 피난 오게 되고, 선생님은 그들과 수시로 만나 예술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1953년 대구미문화원에서 열린 첫 개인전 때는 마해송, 박두진 등의 문인이 그의 화풍에 대한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박두진은 한 일간지에 '금세 워이워이 들판으로 소라도 몰고 나갈 농부와 같이 소박하면서도 끝없는 겸허와 예리한 지성을 가진 작가'라고 평했다.

많은 학자들이 우리나라 현대미술 시작의 기점을 1957년 무렵으로 잡고 있다. 그 해에 서울에서 중견작가들로 구성된 모던아트협회가 창립되었기 때문이다. 모던아트협회는 표현주의, 입체주의를 초월하려는 보다 적극적인 전위 회화운동으로, 창립 회원은 박고석·한묵·유영국·황유엽·이규상·황염수 등이었고, 2회 전시 이후에 김경·천경자·문신·정규, 그리고 정점식 등이 참가했다. 모던아트협회 회원들의 작품은 대체로 구성주의적 추상을 지향하여 그 뒤에 오는 앵포르멜 회화운동과 1960년대의 구상회화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1970년대 이후 선생님은 문자의 형태를 활용한 작품을 시도했다. 화면에서 역동적인 형태가 나타나고 서예와 같은 붓놀림이 이어졌다. 1978년 무속의 부적과 같은 형상을 그린 '발(拔)' 이라는 작품으로 『계간미술』에서 평론가 11인이 선정한 '한국 추상화가 베스트 10'에 뽑혔다. 이것은 대구 지역을 떠나지 않고 활동하던 그가 '한국의 화가'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선생님은 그림뿐만 아니라 이론에서도 이름 높았다. 특히 그의 글은 간단명료하면서도 깊은 뜻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다. 미술 평론가 유준상은 평론을 통해 그를 일컬어 '문체의 사상가'로, 시인 김춘수는 '출중한 문장력을 가진 화가'로 칭송했다. 여든을 훌쩍 넘겨 아흔을 바라보던 때까지도 책을 가까이 했고, 그는 생애 동안 예술관과 삶의 철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네 권의 에세이집을 묶어냈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작고 한 해 전이었던 2008년이었다. 그때도 그는 1955년 개인전 때 스무 살 남짓의 한 소녀가 방명록에 남긴 글의 한 구절을 이야기했다. '벅차오르는 마음에서….' 그는 그 글과 소녀에게서 받았던 감동을 평생 잊지 못했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던 내 그림을 보고 어린 소녀가 무엇인가를 느끼고 그것을 글로 표현한 것이 너무나 기뻤다.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작가는 보람을 느낀다." 한국미술의 거장으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존경받은 그였지만, 한 명의 예술가로서 회상한 생애 감동의 순간은 이처럼 소박했다.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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