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선거로 비리 세탁하는 창의 나라

입력 2021-03-02 05:00:00 수정 2021-03-02 06:10:06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열린 제102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열린 제102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그는 정부 고위급 관리 자녀로, 학생회장에 뽑혔다. 회장의 위력을 앞세워 어린 하급생을 성(性)으로 괴롭혔다. 부회장을 비롯한 학생회 간부는 물론 학교 당국도 모른 체 외면했다. 계속된 괴롭힘에 하급생은 절망했다. 어느 날, 또래 자녀를 둔 학교 앞 가게 주인이 어쩌다 풍문을 듣고 교육 당국과 사법기관에 신고했다.

그러나 어떤 조치도 없었다. 결국 주인은 가게 앞에 사연을 적은 대자보를 붙였다. 그러자 학교 등 여러 기관에서 가게에 협박했다. 생계 걱정에 주인은 글을 내리고 입을 닫았다. 결국 어린 학생은 자퇴했고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학생회장은 이를 자랑했고, 사회관계망을 통해 퍼지자 당국은 그제서야 조치하는 시늉에 나섰다.

어쩔 수 없이 회장은 물러났고 다시 선거가 공고되자 억울했던 그는 대리 학생을 내세웠다. 대리 후보를 위한 '특별한 공약'도 준비했다. 학생과 학부모도 솔깃할 '전 학생 개인 교통편 제공'이었다. 여기에 '성(性) 비위 문제 학생의 불이익과 차별 철폐'도 넣었다. 앞은 세금으로 가능하다는 아버지 말을 믿고 공약했고, 뒤는 학내 여학생이 소수이고 자신과 같은 피해자(?)를 막고자 한 속셈이었다.

마침내 대리 학생은 당선됐고 공약 이행을 위한 작업이 추진됐다. 그러나 곧 난관에 부딪혔다. 학교를 지원할 재단이나 교육 당국의 어느 규정에도 당선 학생의 공약 이행을 도울 근거가 마땅하지 않았다. 이에 학교와 교육 당국은 정부의 특별 지원을 받아 공약 이행을 위한 '특별 조례'를 급조해 문제 해결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학교는 달라졌다. 학생 등하교 조건은 나라 안에서 최고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여학생 입학이 줄었고, 아예 사라졌다. 남학생 입학도 내리막길이었고 학교는 학부모 기피 대상이 됐다. 학생 사이에 '정의, 공정, 평등, 신뢰' 같은 피 끓는 단어는 실종됐다. 학교는 '불공정, 불의, 불평등과 차별'이 일상인 그런 현장으로 변했다.

이런 일은 건전한 상식이 통하는 공동체 사회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가상의 세상에서나 일어날 만하다. 물론 비정상이 정상인 사회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4월 재보궐 선거를 앞둔 현실을 보면 이런 가상의 모습이 겹쳐진다. 성 비위로 빈 자리가 된 단체장 선거에 국민 호주머니를 털 특별 공약이 넘실댄다.

여당은 물러난 공직자 비위를 선거 공약으로 세탁하고, 선거 승리를 위해 국회와 정치인은 엉터리 특별법을 급조하고, 지도자는 장관에게 강요하고, 장관은 실천의 충성 서약에 바쁜 요즘이다. 절반 넘는 반대 여론 속 겨우 실무 공직자만 법 잘못을 따져 대들지만 여당, 지도자, 자리 욕심의 장관, 특별법 혜택을 누릴 정치인은 귀를 닫았다.

일찍부터 부정과 비리를 세탁하는 창의(創意)와 혁신(革新)의 선거문화 정치를 몸에 익힌 지도자, 장관, 정치인이 자칫 나라 밖에까지 이런 독창의 선거문화를 '한류 방역'처럼 퍼트릴까 걱정이다. 게다가 작금의 비리 세탁에 앞선 세대의 창의 선거 전통을 지켜본 뒷세대마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실력을 발휘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가뜩이나 세계에서도 사기 사건이 많은 나라라는 사법 통계도 언짢은데 비리 세탁의 '한류 선거문화'까지 돋보이면 어찌 끔찍하지 않겠는가. 4월 선거의 정치인이야 나라 앞날과 백성 호주머니 걱정보다 당과 개인 잇속이 최고인지라 기댈 건 없지만 유권자조차 이들 정치인의 표를 사는 헛정치에 헛표를 던질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다. 102년 전 목숨 바쳐 이런 나라 찾으려 독립을 외친 3·1절의 함성이 그저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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