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시시각각] ㊴ 독립운동 성지 대구 & 달성토성

입력 2021-03-02 06:01:00 수정 2021-03-02 14:20:51

1915년 8월 25일, 전국의 청년들이 비밀리에 모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장소인 대구 달성토성. 삼국시대에 토성을 쌓은 이후 대구읍성이 들어서기 전까지 달구벌의 정치 중심지였던 이곳을 일제는 공원(1905년)으로 조성한 뒤 대구신사(大邱神社.1914)를 짓고 참배를 강요했다. 달성토성에 아침 햇살이 밝아오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1915년 8월 25일, 전국의 청년들이 비밀리에 모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장소인 대구 달성토성. 삼국시대에 토성을 쌓은 이후 대구읍성이 들어서기 전까지 달구벌의 정치 중심지였던 이곳을 일제는 공원(1905년)으로 조성한 뒤 대구신사(大邱神社.1914)를 짓고 참배를 강요했다. 달성토성에 아침 햇살이 밝아오고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대한광복회 지휘부 회의 상상도. 중앙부터 왼쪽으로 박상진 총사령, 김좌진 만주 지부장, 우재룡 지휘장,김한종 충청도 지부장, 권영만 지휘장, 이병호 전라도 지부장, 채기중 경상도 지부장. 사진=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대한광복회 지휘부 회의 상상도. 중앙부터 왼쪽으로 박상진 총사령, 김좌진 만주 지부장, 우재룡 지휘장,김한종 충청도 지부장, 권영만 지휘장, 이병호 전라도 지부장, 채기중 경상도 지부장. 사진=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일제강점기 달성토성에 들어선 대구신사(大邱神社). 일제는 1905년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한 뒤 1906년에 요배전, 1914에는신사를 건립했다. 1937년에 총독부가 관리하는 국폐소사(国幣小社)로 승격돼 증축했다. 대구신사는 해방 후 1966년이 되서야 철거됐다.
일제강점기 달성토성에 들어선 대구신사(大邱神社). 일제는 1905년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한 뒤 1906년에 요배전, 1914에는신사를 건립했다. 1937년에 총독부가 관리하는 국폐소사(国幣小社)로 승격돼 증축했다. 대구신사는 해방 후 1966년이 되서야 철거됐다.
1937년 총독부가 관리하는 국폐소사(国幣小社)로 승격후 새로 증축한 달성토성 내 대구신사. 신사건물은 해방 후 1966년이 되서야 철거됐다.
1937년 총독부가 관리하는 국폐소사(国幣小社)로 승격후 새로 증축한 달성토성 내 대구신사. 신사건물은 해방 후 1966년이 되서야 철거됐다.
일제강점기 달성토성 중심부에 들어선 대구신사(大邱神社)(위). 대구신사는 1966년에 철거되고 동물원과 공원관리사무소 등의 건물이 들어섰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일제강점기 달성토성 중심부에 들어선 대구신사(大邱神社)(위). 대구신사는 1966년에 철거되고 동물원과 공원관리사무소 등의 건물이 들어섰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달성토성 내 테니스장 롤러로 사용된 신사 도리 기둥석. 일제강점기 신사 건물에 사용된 석재가 지금도 토성 곳곳에 남아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달성토성 내 테니스장 롤러로 사용된 신사 도리 기둥석. 일제강점기 신사 건물에 사용된 석재가 지금도 토성 곳곳에 남아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달성토성 테니스장 입구에 방치된 신사 도리받침대. 받침대에는 일본인 우미노 다케오(海野武男)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달성토성 테니스장 입구에 방치된 신사 도리받침대. 받침대에는 일본인 우미노 다케오(海野武男)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달성 토성에 자리한 왕산 허위선생 순국 기념비. 의병장으로 싸우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1호로 순국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스승이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달성 토성에 자리한 왕산 허위선생 순국 기념비. 의병장으로 싸우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1호로 순국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스승이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달성공원에 자리한 석주 이상룡 구국 기념비. 1910년 경술국치 이듬해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이끌었다.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으며 1932년 중국 길림성에서 순국했다.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달성공원에 자리한 석주 이상룡 구국 기념비. 1910년 경술국치 이듬해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이끌었다.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으며 1932년 중국 길림성에서 순국했다.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대구 두류공원에 세운 애국지사 우재룡 선생상. 대한광복회 지휘장으로 군자금 모집과 국외 연락책임을 맡았다. 1915년 12월 경주에서 세금을 수송하는 우편마차를 습격해 군자금을 확보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대구 두류공원에 세운 애국지사 우재룡 선생상. 대한광복회 지휘장으로 군자금 모집과 국외 연락책임을 맡았다. 1915년 12월 경주에서 세금을 수송하는 우편마차를 습격해 군자금을 확보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토성.

시낭송회장에 전국의 청년들이 속속 모였습니다.

"오인은 대한독립광복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供)함은 물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절대 불변하고 결심

육력(戮力)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誓告)함"

난데없는 결의문이 비장했습니다.

시낭송회로 일제의 눈을 피해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풍기의 광복단이 합쳐

(대한)광복회가 결성되는 순간 이었습니다.

총사령 박상진, 만주 부사령 이진룡(이후 김좌진)

지휘장 우재룡·권영만,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

본부는 곡물상으로 위장한 약전골목 상덕태상회.

만주에서 무장 항일 독립전사를 키우자며

국내외에 지부를 두고 군자금을 모았습니다.

일제의 세금·금광 수송마차를 습격하고,

전국의 부호들에게 의연금을 호소했습니다.

일제 앞잡이 부호는 가차없이 처단했습니다.

기밀이 누설돼 요인들이 체포됐습니다.

박상진·채기중·김한종·임세규·김경태 지사가

사형으로 순국했습니다.

1910년대 최대 무장 항일 독립운동단체

대한광복회가 출범했던 달성토성.

기원전부터 달구벌의 역사가 서린 땅.

노블레스 오블리주, 서침나무가 자라는 땅.

정유재란때 왜군이 이곳 경상감영을 불살랐던 곳.

동학을 잡겠다고 일본군이 머물던 곳.

대구 핵심 사적지를 공원(1905)으로 둔갑시켜

신사(神社·1914)를 짓고 참배를 강요하던 곳….

식민살이는 안된다고, 국권을 되찾자며

애국 지사들이 울분을 삼키던 이곳인데

멋모르고 코끼리, 원숭이만 쫓아 놀았습니다.

1925년 기준 대구 독립유공자는 159명.

당시 인구 비례에서 서울(427명)의 1.6배,

부산(73명)의 3배, 인천(22명)의 5배 였습니다.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유공자는 186명.

서대문형무소(175명) 보다 많았습니다.

'독립운동의 성지, 대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구에도 독립운동기념관을…"

애타는 마음에 우재룡 지사 아들 우대현 선생이

사유지를 내 놓아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한참 늦었지만 이참에 반드시 지을 일입니다.

동물원이 이전되면 온전한 사적지로,

달구벌의 역사·문화 노른자로 떠 오를 달성토성.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이 곳에

대구독립운동기념관이 들어선다면

이만한 위치, 이만한 교육의 장도 없을 것입니다.

달성토성에 든 아침 햇살이 새봄을 알립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