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 먹게 됐다. 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21번째 이야기 봉정사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다.'
1999년 4월 21일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이 국빈 방문 중 봉정사를 찾아 방명록에 감회를 썼다. 여왕은 '한국의 산사'에서 한국의 봄을 제대로 느꼈던 모양이었다. 이제 이 꽃샘추위도 물러나고 나면 거칠 것 없는 봄이다.
메마른 대지는 다시 살아나고 바람에는 봄기운이 물씬 묻어나면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이미 남쪽에선 파릇파릇한 보리싹이 봄을 알리고 있고 동백은 마지막 내리는 눈 속에서도 붉디붉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봉정사로 가는 길 옆으로 난 논두렁, 밭두렁에서는 봄농사를 준비하려 거름을 내는 안동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봉황이 앉은 자리에 지은 절이라는 의미의 '봉정사'(鳳停寺).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인 서기 672년, 능인대사의 전설로부터 시작된다. 능인대사가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봉정사가 자리잡은 천등산 자락의 한 바위굴에서 불법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렇게 십년을 수도하는 그에게 어느 날 밤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나 유혹했다. 산 속에서 수도에 정진하던 능인은 하마터면 여인의 유혹에 넘어갈 뻔 했다. 그러나 능인은 "나는 편안함을 바라지 않으며 부저님의 공덕을 사모할 뿐 세속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며 여인의 유혹을 뿌리쳤다.
그 여인은 옥황상제가 보낸 시험이었다. 여인이 물러나자 하늘에서 바위굴에 등(燈)을 보내 어둠을 쫓아 수도에 정진하도록 보살폈다. 그 때부터 이 산을 천등산(天燈山)이라 부르게 됐다는 전설이다.

수도를 마친 능인대사가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렸더니, 학가산을 거쳐 지금의 봉정사 자리에 앉았다. 능인은 봉황이 앉은 자리에 절을 지어 봉황이 머무른 곳이라는 의미로 봉정사라 이름을 지었다. 봉정사의 전설은 그렇게 끝도 없이 이어졌다.
봉정사는 안동에서는 가장 큰 절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큰 절이라는 위압감도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부담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조용한 '산사'(山寺)다. 함께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통도사나 법주사 같은 사찰보다는 훨씬 작은 전형적인 산사다. 영국여왕이 안동에 와서 하회마을과 봉정사를 찾은 것은 이같은 절제된 한국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대웅전 등이 배치된 본당 영역은 아기자기하면서도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산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건물이자 고려시대의 간결하고도 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극락전, 조선시대 건축된 최고(最古)의 대웅전, 고금당과 화엄강당, 무량해회, 스님들이 기거하는 공덕당 만세루 종각 등이 고풍스러우면서도 질서정연하게 배치돼있다.

천등산 등산로에 도착,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산 후 봉정사까지는 걸어서 20여분 정도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 매표소에서 가는 길은 다소 가파르게 여겨졌지만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아스팔트가 깔린 좁은 산길이었지만 양 옆으로 늘어선 '소나무길'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기대감이 들 정도로 길은 편안했다. 삐뚤삐뚤하면서도 질서정연한 듯 보이는 숲길에 펼쳐진 소나무의 선(線)은 세상 어느 나무도 따를 수 없는 한국의 산에서만 볼 수 있는 곡선이다.
유명 사진작가 배병우가 찍은 경주의 소나무는 우리 산 어느 곳에나 있다. 다만 소나무를 보는 각자의 시선이 다를 뿐이다.
쭉 뻗은 전나무나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자란 키다리 잣나무숲에서 느끼는 위압감과는 다르게 소나무 숲길에선 자연과 일체가 되는 듯 몰입과 동화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의 '길없는 길'에서 본 '경허선사'의 게송을 통해 봄기운 듬뿍 받고 있는 산사 봉정사의 하루를 만끽해본다.
'世與靑山何者是 春光無處不開化'(세상과 청산, 어느 것이 옳은가. 봄볕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꽃이 피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가 사는 속세와 산사가 자리한 청산, 어느 곳이 옳은가 시비를 가릴 필요가 없다. 봄볕이 따뜻한 봄이 되면 속세든 청산이든 꽃은 필 것이니 속세와 청산, 어느 곳이 옳은지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 꽃이 피는지 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봄볕(春光)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산사에 오르며 삶의 게송 하나를 기억해냈다. 우리는 불자(佛子)가 아니어도 산사를 찾는다. 그 산에 절이 있어 오르는 것이지 그 절을 찾아 굳이 그 산을 오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산사가 없는 산은 그저 적막한 산이지만, 산사가 자리하고 있는 산은 누군가를 찾아나서는 설렘이 수반된다. 그래서 산행도 좋지만 그 산에 있는 산사를 찾는 산행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조계사와 봉은사 같은 조계종의 본산은 서울시내 한복판에 있지만 산사는 살아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이자 전통적인 불교유산을 대표한다. 산사에 가서 기도를 하고 공부를 하기도 하고 출가를 해서 수행을 했다.

봉정사로 들어서는 일주문(一柱門)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산사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중 첫 번째 문이 일주문인데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산사에 들어서려면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부처의 세상으로 들어오라는 가르침을 담았다. 역시나 봉정사 일주문도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얻는 일반적인 집과 달리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얻는 형태였다. 일주문의 기와지붕이 마치 머리가 지나치게 큰 '가분수'처럼 불안정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산사의 영역이다. 산사에 들어갈 때는 일주문을 우회하지 말고 반드시 이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생각보다 본당은 일주문에서 가깝다. 눈앞에 거대한 돌에 새긴 세계문화유산 봉정사 간판이 들어오고 눈을 들면 바로 절이 보였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누각으로 들어서게 된다. 만세루(萬歲樓)다. 봉정사 본당으로 들어서는 출입구에 해당하는 만세루를 통해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전과 화엄강당, 그리고 무량해회 등이 ' ㄷ '자 형태로 배치돼있다. 만세루는 종루의 역할도 한다. 만세루는 문득 병산서원의 만대루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조선시대 서원의 대표적인 강당이었던 만대루처럼 봉정사 만세루 역시 '불법'을 공부하는 학승과 선승들의 강당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만세루는 조선시대인 1680년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데 17세기 후반 목조건축물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본당인 대웅전과 바로 옆의 극락전, 고금당은 각각 보물과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다. 불교 문화재를 보는 안목이 없어도 가지런하게 배치된 봉정사 본당 영역은 잠시 둘러만봐도 경건함을 느끼게 했다.
대웅전을 지나 오른쪽으로 비껴나 걷다가 만나게 되는 요사채는 영산암이다. 이곳에서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란 영화를 촬영하기도 했다. 영산암으로 오르는 계단은 '사진명소'로 알려져 있어 '인생샷'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셀피' 인생샷도 가능하다.
속세의 번뇌와 고민이 쉬이 해결되지 않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은 산사를 찾아 마음의 평정을 찾는 '템플스테이'를 하기도 한다. 나 역시 문득 하루 이틀 정도 세상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사에서 지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산사에서의 '느릿느릿 스테이'는 아직 실천하지 못한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천등산은 574m로 산행하기에도 힘들지 않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산행을 시작해도 되고 매표소 입구쪽에 있는 주차장 쪽에서 등산로를 따라 산행을 시작하면 굳이 표를 끊지 않아도 된다.
주차장 쪽에 가볍게 요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있고 봉정사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분위기 좋은 찻집도 여럿 있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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