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의 한시산책] 창밖의 매화(詠窓前梅) - 이현일

입력 2021-02-06 06:30:00

창밖에 서 있는 네 그루의 매화나무 窓前四梅樹(창전사매수)

황혼녘 달을 향해 꽃망울을 터뜨렸네 開向黃昏月(개향황혼월)

꽃 아래서 술이라도 마시고 싶지마는 欲飮花下酒(욕음화하주)

성궐을 오랑캐가 포위했다 하는구나 奴賊圍城闕(노적위성궐)


"어여쁨이야 / 어찌 / 꽃뿐이랴 // 눈물겹기야 / 어찌 / 새잎뿐이랴 // 창궐하는 역병(疫病) / 죄(罪)에서조차 / 푸른 / 미나리 내음 난다 / 긴 봄날엔"

허영자 시인의 시 '긴 봄날'의 일부다. 아직 겨울 추위가 매섭기는 하지만, 유사 이래로 봄에게 이기는 겨울은 없었다. 이제 곧 "창궐하는 역병 / 죄에서조차 / 푸른 / 미나리 내음"이 나는 긴 봄날이 다가올 게다. 따뜻한 남쪽 고을에서는 홍매화가 이미 꽃망울을 터뜨렸다고 하지 않던가.

퇴계로부터 발원한 영남 학맥의 적통을 이어받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지은 '영창전매(詠窓前梅)'에도 봄이 돌아왔다. 바야흐로 창밖에 서 있는 네 그루의 매화나무가 저녁 달빛 아래 꽃망울을 펑펑 터뜨리고 있다. 이런 몽환적인 저녁에는 매화나무 아래서 술이라도 마시며 낭만과 풍류를 누려보고 싶다. 하지만 느닷없이 오랑캐가 쳐들어 와서 성궐을 포위하고 있다고 하니,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작자의 나이 불과 열 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인조(仁祖)가 머무르고 있던 남한산성이 오랑캐에게 포위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었다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열 살 먹은 꼬마의 시일까? 열 살짜리 꼬마가 술을 마시며 놀고 싶은데, 나라 걱정 때문에 도무지 그럴 수가 없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될까?

아마도 말이 되지 싶다. 연보에 의하면 갈암은 일곱 살 때 글 공부를 시작했고, 아홉 살 때 지은 한시에서 이미 큰 인물이 될 조짐을 확연하게 드러냈던 천재였다. 친형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이 장래의 포부가 무어냐고 묻자, "원수(元帥)가 되어 오랑캐를 무찌르고 요동 땅을 수복하겠다."는 깜짝 놀랄 대답을 했던 것도 고작 아홉 살 때 일이었다.

물론 그 어린 꼬마가 술을 마시고 싶다고 대놓고 말한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작품 속의 화자가 작자 자신이 아니라 주변의 어른이라 생각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을 게다. 어른이 아이의 마음으로 쓴 동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듯이, 어린아이가 어른의 마음으로 쓴 '어른 시'도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런 시는 결코 나올 수가 없을 터. 열 살 먹은 꼬마도 이토록 나라를 걱정하는데, 그런데 나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도대체 몇 살을 더 먹어야 철이 들까 몰라. 철이 들기는 들랑가 몰라.

이종문 시조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