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빛나는 이름 '난설헌'

재작년 11월, 강릉에서 군 생활을 하던 아들의 부대개방 행사가 있었다. 가기 전에 검색을 통해 아들과 좋은 추억을 쌓을 몇몇 곳을 알아보고 갔는데 그 중 한 곳이 허난설헌의 생가였다. 강릉에 가면 꼭 한 번 가봐야지 마음먹은 곳인데 아들 면회 핑계로 가 보게 되었다. 아마도 소설 '난설헌'이 이끈 게 아닌가 싶다.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솔밭을 걸으니 400여 년도 오래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요즘 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허난설헌은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유년과는 반대로 험난하기만 한 결혼 생활을 했다. "여자로 태어난 것과 조선에 태어난 것, 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했을 정도다. 스승 이달에게서 시를 배워 천재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김성립과의 원만하지 못한 결혼 생활과 시어머니 송씨와의 고부갈등 등으로 그의 천재성은 결혼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소헌이도 나와 같은 삶을 이어 받겠구나…' 차별받아야 하는 여자의 운명을 걸머쥐고 나온 소헌이 그미는 한없이 가여웠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벽이, 어둠의 벽이, 남편의 벽이, 법도의 벽이 그미를 향해 점점 좁혀 들어오는 것만 같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젖을 빨고 있는 소헌의 이마에 툭 떨어진다."(201쪽)
남성 중심의 제도권 안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기에 딸인 소헌을 안고 눈물을 흘린다. 조선은 똑똑한 며느리를 원하는 시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똑똑하면 남편의 앞길을 막는다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내세울 것도 잘난 것도 없는 김성립이 시대를 잘 만난 덕분에 그나마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렸단 걸 400여 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백일홍은 맨살이다. 그래서 꽃 색깔이 저다지 진분홍인가. 있는 그대로 발가벗고 서 있는 나무… 그미의 눈가에 눈물이 핑그르르 어린다. 겹겹이 감추고, 숨기고, 억압하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순수한 본성까지도 작은 틀 속에 가두려는 제도와 인습이 문득 진저리쳐진다. 내 어찌 이 땅에 아녀자로 태어나 이 작은 틀 속에 갇힌 신세가 되었던고, 죽어 다시 태어나면 저 너른 중원천지를 말 타고 달리는 남정네로 태어나리라."(245쪽)
이 책에서는 여러 대목에 걸쳐서 난설헌이 조선 땅에 아녀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남정네로 태어났더라면 동생 허균과 더불어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고 더 많은 작품이 전해졌을 것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중국에서 조선의 허난설헌 시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요즘으로 치면 작가와 작품을 해외에서 알아준다는 것이고 번역본까지 나온 경우가 아닌가.
지구촌 곳곳에는 아직 남녀차별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곳이 많다. 사우디에서는 최근에야 여성에게 운전면허를 허가해 주었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의 나라도 아직은 여성이 살아가기에 척박한 환경이 많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타고난 재능을 꽃피워 보지도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는 이야기를 대화 중에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보면 행복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남긴 작품보다는 생애 위주로 된 이 소설은 난설헌을 더 깊이 알고 싶은 사람이 읽어보면 좋겠다.
손인선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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