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외국으로 유학 갈 때 나는 산으로 유학을 갔다. 지인들이 프랑스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 나는 산 속에서 혼자 도사과정을 밟았다. 한때 하산하여 박사과정을 이수해 봤지만, 내게는 박사보다 도사가 맞는 듯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한 건 순전히 능력부족 탓이지만, 체질적으로도 박사보다는 도사 쪽인 듯싶었다. 나는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산속 재실로 갔다.
박사학위가 학계의 인증이라면 도사는 자연계의 인정이다. 외국어(外國語)가 필수인 박사처럼 도사는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언외어(言外語)가 필수다. 박사가 많은 사람과 객관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논문을 써야한다면, 도사는 오로지 자신의 몸에 성취를 새겨 넣어야 한다. 박사가 뭔가 분석하고 연구하여 가치 있는 논문을 쓰는 것이 목적이라면, 물론 대부분 인간에게 가치 있는 것이지만, 도사는 과정이 곧 목적이다. 뭐,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도사는 객관적이지 않다.
박사와 도사를 비교하자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길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박사는 넓고 깊게 제대로 자신만의 지적 성취를 이루어내야 한다. 요즘은 AI가 박사논문의 표절시비를 순식간에 가려내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박사는 정말 어렵다. 아무나 따는 것이 아니다.
내가 도사과정에 입문했을 때는 학구열에 불타거나 뭔가를 이루어내기 위한 의지와 희망으로 가득했다, 라기보다는 인생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내려놓았을 때였다. 내 안의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사는 엉키고 꼬여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절망에 빠져 자신을 팽개칠 때가 오히려 도사과정에 입문하기 좋은 시절이다. 세상의 가치를 집어던지고 자신의 가치를 뒤집어 쓸 수 있는 용기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찾아온다.
자의 반 타의 반 도망치듯 산으로 가 도사과정을 시작했을 때 내가 처음으로 느낀 것은 해방감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조퇴하고 텅 빈 운동장을 가로 지를 때 느꼈던 '외로운 적막감' 같은 것. 마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있어야 할 곳에 있는데 나만 홀로 떨어져 나온 듯한 낯선 해방감.
산에 눈이 내리면 세상은 멈추고, 진공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푹푹 내리는 눈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아, 본래 길은 없고 걷는 순간 생긴다. 길은 묻는 게 아니라 걷는 것이고, 가기 위해 걷는 게 아니라 걷기 위해 간다. 도사는 무슨. 도사는 없다. 걷는 사람은 있다. 덧없음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도사로구나. 눈이 녹자 풍경이 보였다.
여기 문제가 하나 있다. '곤충의 몸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 □ □' 라는 문제다. 아마도 이 문제의 객관적인 정답은 머리, 가슴, 배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길을 가는 우리네 도사들의 정답은 다 다를 것인데, 어느 초딩 도사가 삐뚤빼뚤 적어놓은 정답은 이랬다. 죽, 는, 다.
리우 영상설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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