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 먹게 됐다.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tvN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의 무대 만휴정
만휴정
안동이 가까워진 것인가? 서울이 가까워진 것인가?
안동사람들에게는 서울나들이길이 2시간으로 당겨진 것이겠지만 서울사람들에게는 안동여행이 편해진 것이리라. 손수 차를 몰고 이리저리 다니는 여행이 대세지만 그래도 기차타고 가는 여행은 다르다. 안동에 도착해서는 '쏘카' 등의 공유자동차를 이용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그리 큰 불편은 없다.
안동이 서울 수도권과 가까워지면서 안동사람들로서는 코로나사태가 완화되면 너무 많은 서울사람들이 몰려오지나 않을까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안동에는 그저 눈으로 보고 사진만 찍고 가기에는 아쉬운 뿌리깊은 역사와 고즈넉한 풍경, 그리고 사람이 있는, 세상 어디에서도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이 널려있다. 이름난 관광지는 아니지만 안동을 안동답게 해주는 그런 숨어있는 안동의 명소를 찾아서 가자. 오늘은 드라마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2018년 인기리에 방영된 <미스터션샤인>. 남자주인공 유진(이병헌)이 여주인공 애신(김태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합시다 러브. 나랑 같이"라는 명대사를 날린 외나무다리가 있는 '만휴정'과 두 주인공이 배를 타고 떠나는 나루터가 있는 '고산정'이 그곳이다.
드라마 속 그곳으로 떠나자.

만휴정(晩休亭)은 안동에서 길안천을 따라 청송으로 가는 한적한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인기드라마의 무대가 되지 않았다면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원림으로서 선비들의 정취를 뽐내는 오래된 정자 중의 하나로 여전히 숨어있었을 법한 곳이다. 드라마의 여운은 깊고도 길다. 드라마가 끝난 지 1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이곳을 찾아 만휴정 외나무다리를 찾아 '인생샷'을 찍는다. 코로나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여행객들이 주춤하지만 평소 주말에는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설 정도다.
안동에서 길안면 소재지를 지나 청송 쪽으로 달리다보면 오른쪽에 '만휴정'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로 들어가서 작은 다리를 지나면 임시주차장이 나온다. 차를 타고 왔다면 이곳에 주차를 하고 천천히 마을길을 따라 산 쪽으로 오른다. 그렇게 10여분 걸었을까. 숲 사이로 팔작지붕을 한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름 내 정자 앞을 시원하게 식혀주던 계곡 폭포는 꽁꽁 얼어붙었다. 계곡을 흐르던 물소리조차 얼려버린 매서운 한파다.
계곡을 가로질러 외나무다리 하나가 놓여있고 다리 건너에 아주 작은 정자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드라마에서 본 것과 똑같은 그 '만휴정'이다. 드라마 속 두 주인공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주고받던 장면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내가 그가 되고, 그가 바로 나였다. 계곡을 가로지른 시베리아 북풍이 코끝을 때렸다.
계곡과 숲과 정자와 사람이 하나가 되는 공간이 만휴정이다.

조선 중기 지천명의 나이에 늦깎이 과거급제한 김계행(金係行:1431-1517)이 홍문관 대제학 대사성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 연산군의 폭정이 시작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만년(晩年)을 편안하게 쉬겠다며 지은 정자다. 김계행의 집은 원래 풍산(안동)이었으나 이곳 묵계리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만년에 기거하기 위해 땅을 마련했고 정자를 지었다. 당쟁을 피해 만휴정에 은거하다시피 했지만 만년의 그도 사화를 피하지는 못했다.
정면에서 볼 때 3칸짜리 만휴정은 자연 속에 동화된 고고한 선비의 기개를 닮아 원래 거기 있었던 듯 자연스럽다. 중요문화재로 지정돼있어 '누마루에는 오르지 말라'는 당부에 따라 정자에 오르지 않아도 '만휴정 중수기'와 여러 선비들의 시들이 걸려있는 게 보였다. 시인묵객과 제자들이 이곳을 찾아와 김계행과 풍류를 나누는 모습이 상상됐다.
만휴정 앞 계곡으로 내려섰다. 여름에는 물장구치고 멱을 감을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했을 소(沼)는 꽁꽁 언 빙벽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달빛 별빛을 벗 삼아 소박하게 사는 삶이 그립다.
김계행의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스스로 권력과 재물을 경계한 '청백리'였다. 보백당이란 호는 만휴정에 걸려있는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내 집에는 보물이 없으며, 보물이라면 오직 맑고 깨끗함 뿐이다)라는 편액에서 취한 것. 만휴정 내 동쪽에 걸려있는 '持身謹愼 待人忠厚'( 겸손하고 신중하게 몸을 지키고 충실하고 후하게 사람을 대하라)"라는 경구 역시 그의 삶의 철학이었다.
문득 이백(李白)의 시에 나오는 '別有天地非人間'(다른 세상이로되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네)라는 한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서 유진이 하자던 '러브'도 여기선 자연의 일부가 된다. 시소처럼 오락가락하던 그들의 사랑도 이곳 만휴정에 와서야 '러브'하자고 할 정도로 자연스러워진 것이 아닐까.
드라마에서 벗어나 다시 청송가는 국도 건너편에 있는 묵계서원으로 갔다. 묵계서원은 큰 길 국도변에 있다.
묵계서원은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凝溪) 옥고(玉沽:1382∼1436)를 봉향하는 서원으로, 1687년(숙종 13)에 창건되었다. 묵계서원은 1869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후에 강당과 문루인 읍청루와 진덕문, 동재(東齋) 건물 등을 복원했다. 강당인 읍청루(挹淸樓)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 건물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묵계서원과 인근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묵계종택'에서는 고택숙박도 할 수 있다. 묵계서원 바로 옆에 있는 '카페 만휴정'에 들러 차 한 잔하면서 여유를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산정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서 어린 유진이 도망을 쳐서 몸을 숨긴 배가 있는 나루터, 우연히 애신을 만나게 된 나루터 장면을 찍은 곳이 '고산정'(孤山亭)이다.
만휴정에서 바로 고산정으로 가거나 고산정에서 만휴정으로 바로 가는 여정은 안동 시내를 거쳐서 가야 할 정도로 꽤 멀다. 만일 안동여행에서 두 곳을 다 둘러보고 싶다면 곧바로 가는 것보다는 여유를 두고 안동의 다른 명소와 더불어 천천히 보는 것이 더 좋겠다.
고산정은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다. 안동에서 청량산 쪽으로 가서 청량산 입구로 가기 직전에 만나는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과 독산이 있는 절경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인 성성재(惺惺齋) 금란수(琴蘭秀,1530~1604)가 1564년에 지었다. 그래서 퇴계 이황도 문인들과 함께 와서 머물렀던 곳이다.

밤새 눈이 내렸지만 한나절 만에 양지바른 고산정 눈은 다 녹아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북풍한설을 체감할 정도로 청량산을 타고 돌아 나온 바람은 매서웠다.
고산정에 올라 강건너 나루터에서 유진과 애신이 배를 타는 모습을 떠올렸다. 드라마가 끝난 지금은 나루터도 배도 사라지고 없다. 모래위엔 아무런 흔적이 없다. 너무 추워서 찾는 이 없는 그 자리에 가니 모처럼 온 사람이 반가운지 백구 한마가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고산정은 협곡사이를 파고들어 마치 원래 그곳에 있었던 양 자연스러운 입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집은 지나치게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마치 산수화 한 폭 그려놓은 듯 했다.

홍수를 대비한 것인지 축대를 쌓아 기단을 쌓은 위에 정자를 지었다. 강건너에서 보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강 건너는 드라마 속에서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실제로 예전에 그 곳에 나루가 있어 작은 나룻배로 강을 건넜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두 주인공이 배를 타고 출발하면서 닿는 강 건너 가마터가 '만휴정'이다.
가송마을 고산정 앞을 흐르는 낙천은 퇴계 향기 가득한 '도산'을 굽이굽이 돌아 안동댐을 지나 반변천과 합수하여 비로소 낙동강 본류로 자리잡는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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