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에는 내세울만한 음식이 없다. 차, 토스트, 계란, 베이컨, 소시지, 토마토, 버섯 등으로 이루어진 푸짐한 잉글리시 브랙퍼스트(English breakfast)가 있지만, 대부분의 영국인은 먹지 않는다. 영국식 민박인 베드 앤 브랙퍼스트(B & B)에서 주로 관광객들이 먹는다. 대개 금요일에 먹는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 일요일에 먹는 로스트 비프와 요크셔 푸딩(roast beef and Yorkshire pudding), 익힌 감자에 여러 토핑을 얹어 먹는 자켓 포테이토(jacket potato) 정도가 있으려나.
식사 예절은 세세하게 있다. 천천히 적게 조용히 먹어야 한다. 씹을 때는 소리를 내지 않으며, 입에 음식을 넣은 채로 말하지 않는다. 빵은 입으로 베어 먹지 않고, 한 입에 먹을 만큼 작게 손으로 떼어서 먹어야 한다. 포크는 왼손에 나이프는 오른손에 잡고, 포크의 끝은 위가 아니라 아래를 향해야 하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렇게 먹어야 한다. 집기도 어려운 완두콩을 포크의 등 쪽으로 먹는 모습은 묘기에 가깝다. 음식이 맛없고 종업원이 불친절한 식당에서는 불평을 하는 대신 친구들에게 그 식당을 추천하지 않는 것으로 항의한다.
집에서는 식탁 중앙에 음식을 놓고 접시에 덜어서 먹는다. 식당에서는 각자 주문하고 각자 먹는데, 서로 다른 것을 주문해 함께 맛보는 일은 없다. 나누기 쉬운 피자도 한 판씩 앞에 놓고, 커플인데도 따로 먹는 모습을 종종 본다. 케이크 한 조각을 둘이 나눌 때, 우리는 그대로 놓고 각자 포크로 잘라 나눠먹는데, 그들은 케이크의 삼각기둥 모양대로 반으로 잘라 서로 다른 접시에 옮겨 따로 먹는다.
우리는 나눠 먹으면서 경계가 무너지는데, 그들은 나누면서도 경계가 있는 듯하다. 오랜만에 영국에 가면서 친구들 선물을 잔뜩 들고 갔을 때가 생각난다. 나를 환영하는 피크닉이라고 해서 김밥을 나눠 먹는 우리네 소풍 생각으로 빈손으로 갔는데, 자기 샌드위치를 자기만 먹는 친구들을 보며 내가 먹을 음식은 없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바리바리 싸들고 간 선물 생각에 얼마나 섭섭했던지.
영국인은 먹는 것에 열정이 없고 무관심하다. 많이 먹는 것과 음식 얘기를 많이 하는 것을 천박하게 생각한다. 검소함이 몸에 배서인지 음식도 절제하는데, 키 크고 덩치 큰 그들이 우리보다 적게 먹어서 놀랐다. 샌드위치 한 조각을 점심으로 먹고, 먹고 남은 음식이나 차가운 샌드위치로도 저녁이 된다. 매일 감자튀김을 먹는 사람들과 질 낮은 학교급식을 먹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래도 되나 싶었다.
그런 영국이 최근 달라지긴 했다. 전통을 중시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다른 나라의 요리를 받아들이고 요리에 관심이 높아졌다. 요리책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고, 텔레비전에는 요리 프로그램이 많아졌다. 유명 요리사가 신선하고 좋은 재료의 요리를 소개하고, 부실한 학교급식에 변화를 몰고 오면서, 영국의 음식산업을 움직인다. 옛날 방식의 가축 방목을 주장하며 사회운동까지 벌인다. 덕분에 밍밍하고 맛없던 음식은 맛있어지고, 질도 좋아졌다. 이제는 전 세계의 음식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요즘 한국사회는 요리와 건강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대단하다. 텔레비전에서는 몸에 좋은 음식과 운동을 소개하고, 공원과 산책로에는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사람들은 맛집을 찾아가고, 많이 먹고, 건강을 위해 운동한다. 운동 삼아 걸은 후,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면서 무심코 발목을 돌리는데, 건너편에 서있는 아저씨는 허리를 돌린다. 난간에 다리를 올려놓고 스트레칭을 하는 아줌마도 있다. 영국의 공원에는 운동기구가 없고, 영국에는 이런 사람이 없다. 왜 그럴까 물으니, 남편이 "걔네들은 우리보다 덜 뻐근하나보지."라고 해서 웃었다.
한국에 오래 산 영국할머니는 늘 건강을 챙기고 "건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우리가 '건강하면 뭘 할 건데?'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좋은 대학에 가려고 공부하고, 돈 많이 벌어서 성공하려고 일하는데, 좋은 대학 나와서 성공하면 뭘 하려는지 모르겠다. 살 빼려고 매일 걷는 나는 살을 빼서 무얼 하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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