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피는 소중하다

입력 2020-12-08 11:40:51 수정 2020-12-08 23:50:15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거의 모든 사람은 병 때문이 아니라 치료 때문에 죽는다. -몰리에르 희곡 '상상병 환자(1673년 초연)' 中-

원시사회에서는 병을 신이 내린 벌로 생각했고 치료는 무당이나 주술사가 담당했다. 그러다가 고대 그리스 의사들은 병을 논리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인체에는 사(四) 체액, 즉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이 있고 체액 균형이 흐트러지면 병이 생기며, 피를 뽑아서 균형을 회복하면 낫는다고 생각했다. 바로 사혈(瀉血) 즉 나쁜 피를 뽑아서 버리는 치료다.

과학의 암흑기였다. 피가 온몸을 순환한다는 것도, 세포나 세균도 모르던 시절 사혈은 2천 년 이상 아무 의심 없이 만병통치약처럼 온갖 질병에 이용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피 흘리며 죽어갔다.

입덧하는 임부는 사혈을 했고, 입덧이 없어도 예방적으로 사혈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투 전 예민해진 신경을 가라앉히기 위해 사혈 했고 1685년 뇌졸중이 생긴 영국 찰스 2세는 사혈 후 사망했으며 179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 2세도 하루 4번 사혈 끝에 죽었다.

1799년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몸에 이상이 나타나자 당시 미국에서 가장 명망 있던 의사 세 명이 호출됐다. 첫 번째 의사는 병세를 살핀 후 1,770cc 가량 피를 뽑았다. 두 번째 의사도 950cc를 더 뽑아냈으며, 그래도 호전이 없자 세 번째 의사는 다시 1,000 cc가 넘는 피를 뽑았다. 결국 워싱턴은 병명도 모른 채 발병 10시간 만에 몸속 피 절반 이상을 흘린 후 사망했다.

미국에 황열병이 대유행할 때 '펜실베이니아의 히포크라테스, 사혈의 왕자'라 불리며 명성을 누리던 의사 벤자민 러쉬는 하루 100명 이상 사혈을 시행했다. 윌리엄 코베트는 "러쉬의 사혈 치료가 효과는커녕 오히려 인구 감소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비판하다가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여 재판에서 패소했다. 사혈 승!

하지만 사혈의 효과를 의심하는 의사는 계속 나타났다. 1809년 스코틀랜드 군의관 알렉산더 해밀턴은 환자 366명을 무작위로 세 집단으로 나누고 사혈법과 다른 치료의 사망률을 비교한 과학적 대조 연구를 시행한 결과, 사혈치료를 받은 환자의 사망률이 10배나 높음을 알았다. 그 후 비슷한 연구 결과가 이어졌지만 의사들은 사혈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다가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사혈의 무익함과 위험성에 대한 자각이 널리 퍼지면서 현대의학에서 사라졌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헌혈이 줄어들면서 혈액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수혈이 꼭 필요한 환자조차 피를 구할 수 없어 큰 위험에 처해있다. 과거에는 피를 뽑다가 죽었지만 이제는 피를 뽑으면 사람을 살린다. 죽은 피, 나쁜 피, 버려야할 피는 없다. 피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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