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성들은 억울함을 법적으로 어떻게 호소했을까?

입력 2020-11-19 11:16:48

정의의 감정들/ 김지수 지음 /김대홍 옮김/ 너머북스 펴냄

토지 분쟁을 해결해 달라고 관에 제출한 여종 말금의 소지.
토지 분쟁을 해결해 달라고 관에 제출한 여종 말금의 소지.

조선시대 여성들은 자신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어떤 방식의 소원과 서사 전략을 활용하였을까? 이 책의 저자는 여성 소지(所志: 관에 제출한 탄원서 일종)에 주목한다. 단조로운 어조로 된 이야기만을 담은 심리록이나 검안 같은 형사기록과 달리 소지는 송자의 성별, 나이, 사회적 신분에 따라 다면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며, 다양한 서사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젠더와 신분, 법 감정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조선시대 여성, 억울함 호소하는 소지 써 관에 제출
이 책은 현존하는 600여 건의 조선시대 여성의 소원과 관련된 기록(155건은 조선후기 군현과 도에 제기한 여성 소지)에 있는 수많은 노비·평민·양반 여성들의 사연과 법적 공방을 소개한다.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여종 말금의 소원에서처럼 그녀들의 서사는 원통함이나 원의 감정으로 시작되었고 또 끝을 맺는다. 저자는 조선시대 법적 담론과 법적 서사의 핵심이 '억울함'이며, 억울함의 감정을 잘 풀어주는 것이 정의를 확보하는 하나의 기제였고, 평범한 민이 사법제도에 기대도록 만든 주된 동기였다고 주장한다.
백성들이 북을 치며 억울함을 공개적으로 표출함으로써 원통함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한 신문고의 등장은 국가 입장에서 각 개인의 목소리가 권력구조의 정점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허용한 첫 조치였다. 백성은 소원을 했고, 국가는 원이 풀어지도록 힘쓰는 것이 법적 관행의 근본이었다. 이렇듯 조선시대 사법제도는 신분과 젠더를 차별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차별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자기 모순적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저자는 젠더나 신분에 관계없이 법적 주체라는 권한을 부여했던 이면의 국가 역할과 논리를 인식하는 것이 전근대의 사법관행을 이해하는 핵심이라 강조한다.

◆젠더, 글쓰기, 법적 퍼포먼스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법에는 서면 소원(상언)과 구술 소원(격쟁) 등 두 가지가 있었다. 상언은 소지로 청원하는 것이고, 격쟁은 문자 그대도 '징을 치다'는 뜻으로, 임금이 행차할 때 그 길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서면 소원은 글쓰기, 구술 소원은 몸짓, 말투, 표정이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기능했다. 여성과 남성이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남성의 경우 억울함과 관련된 분노를 표출한 반면, 여성들은 고통과 고난을 강조했다. 여성들은 여성 젠더를 강조하기 위해 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연약함과 취약함, 종속적인 지위를 강조하는 연민의 내러티브를 활용해 억울함을 표상했지만, 동시에 국가에 자신들의 억울함을 해소해줄 수 있는 국가 본연의 권한을 따르라고 과감하게 요구했다. 특히 한글로 작성된 여성들의 소지는 여성의 젠더 정체성이 어떻게 고유의 글쓰기로 드러났는지 보여준다.

신분에 따라서 소원의 내용이 달랐다. 양반 여성은 주로 가족의 신원과 입양, 재산 분배, 노비 소유 등이었는데 비해 하층민 여성들은 세금, 토지, 채무, 묘지, 혼인, 구타 등 훨씬 더 다양했다.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었다는 관념이 지배적인 이유는?

20세기 이전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법적 주체로 인식되었으며, 남성에 비해 열등하지 않은 권리능력을 행사하였다. 그런데 왜 남성에게 종속된 조선시대 여성이란 관념이 지배적으로 남아 있을까? 저자는 일제 강점기 조선민사령과 해방 이후 한국법제사 연구의 경향성 이 두 가지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조선민사령의 근거가 된 조선 관습조사보고서에서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아내의 권리능력을 잘못 이해해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었다고 보고 아내가 권리능력을 행사하려면 '전적으로' 남편에게 의존했다고 보았다. 이는 전근대에서 근대적 사법제도의 근본적인 구조변경의 틀이 되었다. 해방 이후 학계에서는 일본의 조사보고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고, 실증 연구보다는 추정에 따라 조선시대 여성의 법적 '무능력'을 사실처럼 받아들여 논의하였다.

저자는 조선에서 권리와 연관될 수 있는 민법이나 사법의 서구적 개념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되면,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 사회의 사법 관행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조선의 법사를 연구할 때 서구법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단지 무의미한 논쟁만 불러일으킬 뿐이기에 역사 속으로 들어가 실제 적용된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308쪽, 2만원.

책
책 '정의의 감정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