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배 고픈’ 그를 기리며

입력 2020-11-14 05:00:00 수정 2020-11-14 07:17:08

12일 오후 대구 중구 남산동 고(故) 전태일 열사의 옛집에서 유족 등이 문패를 달고 있다. 전 열사가 살았던 이 집은 사단법인
12일 오후 대구 중구 남산동 고(故) 전태일 열사의 옛집에서 유족 등이 문패를 달고 있다. 전 열사가 살았던 이 집은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이 모금을 통해 최근 매입했으며 앞으로 복원 등을 거쳐 기념관 등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성일권 기자 sungig@imaeil.com
인열 논설위원
인열 논설위원

"배가 고프다…."

1970년 11월 13일 밤 10시가 조금 지났을 때다.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22년 짧은 삶을 마친 전태일의 마지막 말이다. 사실 그는 전날인 12일 집에서 아침 밥상에 오른 라면 한 그릇 먹은 것 말고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게 그의 고별 식사였다.

그리고 "15일까지 돈 좀 안 되겠느냐"는 여동생의 부탁에 "월급 탈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라. 어머니께 돈 때문에 졸라 대지 않도록 해라"는 당부 후 집을 나섰고, 그것이 가족과의 긴 이별이 되고 말았다. 13일 오후 1시 30분쯤, 평화시장에서 그는 근로기준법 책을 갖고 거리에서 외쳤고, 이미 몸은 불길에 휩싸였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놀란 친구와 노동자, 행인들의 웅성거림 속에 그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울부짖었다. 오후 2시쯤 인근 병원에서 응급치료 중 연락을 받고 달려온 어머니(이소선)의 외침에 "어머니, 놀라시면 안 됩니다"라며 달랬다. 그는 다시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숨졌다.

고인(故人)의 50주기 하루 전인 지난 12일,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노동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그에게 추서했다. 같은 날 그가 태어난 고향 대구 남산동 옛집에 그의 문패가 달렸다. 그는 지난해 설립된 '(사)전태일의친구들'이 모은 4억3천만원으로 사들인 공간의 새 주인이 됐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대구는 조선노동공제회 활동과 남조선노동총연맹 결성 등 노동운동이 활발했다. 노동 독립운동의 역사가 깃든 대구를 이번 서훈과 옛집 공간 마련을 계기로 노동자와 함께하는 세상을 꿈꾼 앞선 사람을 기리고 노사의 대동(大同) 사회로 바꾸면 어떨까 싶다.

특히 대구에는 내년 4월 달성군 구지면에 준공될 예정인 '노사평화의 전당'까지 문을 연다. 이러니 대구를 노사 모두 함께 사는 공동체로 가꾸면 대구는 살 만한 고을이 되기에 충분하다. 노사 모두 그의 옛집과 평화의 전당까지 둘러보는, 그가 외친 '일요일'을 맞을 날도 그리 머지않으리라.

전태일 열사의 장례식에서 영정을 품은 이소선 여사. 매일신문DB
전태일 열사의 장례식에서 영정을 품은 이소선 여사. 매일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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