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엔터인사이드] tvN 드라마 ‘구미호뎐'

입력 2020-11-12 14:30:00 수정 2020-11-12 21:22:11

21세기 구미호는 어떻게 진화했나…인간 괴롭히는 요괴들 퇴치 男 구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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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구미호뎐' 현장포토. tvN 제공

구미호는 우리네 전설 속 캐릭터 중 스테디셀러다. '전설의 고향'에서 여름철만 되면 등장하던 구미호는 그 후에도 다양한 버전의 이야기로 탄생했고 그 진화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tvN '구미호뎐'은 그 흐름 위에서 21세기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작품이다.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어온 구미호 캐릭터

해서는 안 될 구미호 이야기를 꺼낸 남편 때문에 인간으로 변할 마지막 하루를 남기고 결국 구미호의 얼굴로 되돌아간 아내. KBS '전설의 고향'에서 말 그대로 전설이 된 구미호의 등장은 그렇게 소름 돋는 공포와 더불어 시작됐다. 너무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쓰거나 양손으로 눈을 가리며 흘끔 흘끔 보았던 구미호 이야기는 그 후로도 꽤 오래도록 우리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스테디셀러였다. 77년부터 12년 간 매주 한 편씩 570여 편이 방영됐고, 96년부터 99년까지 70여 편이 방영되었으며, 2000년대 들어서도 여름 특집기획으로 돌아왔던 KBS '전설의 고향'은 어김없이 구미호 에피소드를 담아냈으니 말이다.

남편 원망하며 하늘로 승천하던 초창기 구미호의 이야기가 시청자들의 호응으로 이어졌던 건 다분히 당대의 가부장적 가치관과 관련이 있었다. 인간이 되고 싶은 구미호가 하필이면 여성으로 그것도 아내로 등장하고 결국 남편이 저버린 약속으로 인해 그 곳을 떠나는 이야기는 가부장제 속에서 억압되어온 여성들의 감정들을 에둘러 담아낸 면이 있었다. 떠나간 구미호를 뒤늦게 그리워하며 아쉬워하는 남편의 후회는 구미호가 인간이 되기 위해(여성이 사람대접 받기 위해) 겪은 천 년 동안의 힘겨운 시집살이에 대한 소극적인 위안이 된다. 자유로운 한 인간이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 아내이자 며느리라는 변신을 강요받고, 또 그 아내이자 며느리가 다시 자유로운 인간으로 변신하고자 하는 이 욕구의 반복은 구미호가 가진 핵심적인 재미를 구성했다.

하지만 이런 캐릭터가 달라진 시대의 감수성 속에서 계속 똑같이 소비될 수는 없었다. 2010년도에 재해석된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구미호의 간을 빼먹으려는 양반이 등장한다. 구미호 같은 가상의 존재가 아닌 인간이 더 무서워진 세상을 반영한 것. 또한 이 작품에는 양반이면 하인들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계급사회의 구조를 담아낸다. 자본화된 세상에 갈수록 첨예해지는 빈부의 양극화, 그래서 귀신보다 더 무서워진 인간이라는 새로운 인식은 '구미호 여우누이뎐'이라는 작품으로 재해석된다.

◆'구미호뎐', 남자 구미호의 탄생

최근 방영되고 있는 tvN 수목드라마 '구미호뎐'이 이색적인 건 남자 구미호라는 사실이다. 물론 남자 구미호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13년 방영됐던 '구가의 서'에서 구월령(최진혁)은 천년 묵은 남자 구미호로 등장한 바 있다. 구월령은 인간 윤서화(이연희)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가 구미호라는 사실이 드러난 후 배신당하는 캐릭터로, 과거 '전설의 고향'의 구미호 이야기와 역전된 성별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남자 구미호가 등장하긴 했지만 '구가의 서'는 그가 주인공이 아니라 이들 구미호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반인반수의 최강치(이승기)가 써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본격적인 남자 구미호 이야기는 아니었다. 반면 '구미호뎐'은 이연(이동욱)이라는 남자 구미호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그렇다면 '구미호뎐'의 구미호는 어떤 점이 다를까.

먼저 이 작품은 '전설의 고향' 속 존재들인 구미호는 물론이고 이무기(이태리), 어둑시니(심소영), 우렁각시(복혜자) 같은 한국의 토착 설화나 전설 속 캐릭터들을 가져오면서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래서 구미호는 슈트 차림에 우산을 들고 다니며 이를 무기로 활용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연이 도시에서 살아가며 인간을 해코지하는 요괴들과 싸우는 장면은 그래서 '전설의 고향' 속 구미호 같은 토속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마블의 슈퍼히어로들의 액션을 보는 것만 같은 캐릭터의 재해석이 들어가 있어서다. 하지만 이런 현대적 재해석에도 불구하고 이무기 전설이나 어둑시니 설화 같은 캐릭터들의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 속 토속적인 공포를 충분히 이끌어낸다. 그만큼 현대적 재해석과 고전의 이야기가 균형 있게 잘 섞여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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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구미호뎐' 현장포토. tvN 제공

◆보다 깊이 있는 구미호의 해석은 아쉽지만

'구미호뎐'은 전생에서 환생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구조를 가져왔다. 즉 '전설의 고향' 속 구미호 이야기가 가슴 아픈 남녀의 비극적인 이별로 끝맺음 맺고 있듯이, '구미호뎐'의 전생이야기는 이연과 남지아(조보아) 사이에 이무기가 개입하면서 생겨난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즉 남지아의 몸에 들어간 이무기가 이연을 해하려 하자 남지아 스스로 이연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 요구하고,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구미호의 어쩔 수 없는 룰에 의해 남지아가 이연의 손에 죽게 되는 것. 결국 이연은 현대에 환생한 남지아가 전생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이무기와의 일전을 벌이게 된다.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의 재해석은 충분히 되어 있지만, 이연이라는 남자 구미호 캐릭터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해석은 좀 아쉬운 부분이다. 왜 현재 재해석되는 구미호가 남자여야 하고, 그와 남지아와의 운명적인 사랑을 가로막는 방해물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은유를 담아내고 있는가 하는 점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그래서 '구미호뎐'은 달라진 시대의 감수성에 맞는 구미호의 재해석이라기보다는, 현대적 외형을 갖추고는 있지만 어딘지 남녀가 바뀌었을 뿐 과거의 '사랑이야기'로 회귀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또한 '트와일라잇', '신과 함께' 같은 영화에서부터 '손 더 게스트',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 '호텔 델루나', '전설의 고향' 같은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들이 여기저기서 떠오르는 건 이 작품을 보는 시청자들에게 장르적인 혼동을 준다. 멜로와 액션 판타지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공포로 변하는 장르의 변신은 시청자들로서는 몰입이 깨지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특히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에서 저승사자 역할로 각광을 받은 이연 역할의 이동욱은 이 작품 역시 그런 판타지 멜로를 기대하게 하지만, 이 작품은 번번이 판타지에서 공포를 오가며 그런 기대를 배반한다.

이런 아쉬움들이 있지만, 우리네 전설과 설화 속 캐릭터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이끌어낸 것만은 '구미호뎐'이 거둔 중요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야쿠르트 아줌마로 재탄생된 어둑시니나 한식당 우렁각시의 사장으로 등장하는 진짜 우렁각시 복혜자(김수진)처럼 '구미호뎐'은 전설이나 설화 속 이야기에 박제되어 있던 우리네 캐릭터들을 현대에 다시 깨워낸다. 또 이연의 충신 노릇을 해온 구신주(황희) 같은 토종여우 캐릭터를 수의사로 재탄생시켜 현대적 의미의 동물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끄집어낸 점도 흥미롭다.

해외의 '해리포터' 시리즈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물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건 북유럽의 민담이나 전설 속 캐릭터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구미호뎐'이 재해석해 꺼내 놓은 우리네 전설, 설화 속 캐릭터들은 앞으로도 K-콘텐츠가 파야할 중요한 콘텐츠 유산이 아닐 수 없다. 당장의 성패는 갈릴 수 있어도 구미호 같은 스테디셀러 캐릭터의 계속되는 진화가 그만한 가치를 갖는 이유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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