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세상 읽기] 이 가혹한 시간을 어떻게 매듭지을까?

입력 2020-11-08 05:00:00

예술가들은 어쨌든 예술적으로 살아내야만 한다
코로나 종식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꿀벌의 나라’

예술가들의 고통을 말해주는
예술가들의 고통을 말해주는 '최후의 심판' 속 미켈란젤로 자화상.

예술가들에게 코로나19 시대를 산다는 것은 이중고이다. 경기가 위축돼 수입도 줄어들 뿐더러 맘 놓고 전시회조차 하기 힘든 처지다. 아무리 어려워도 순수 예술가의 DNA를 버려서도 안된다. 이런 시기에 창작의 고통은 한층 가중된다. 뭘 해보려 해도 사방이 막혀있는 듯 하다. 해외에도 맘대로 갈 수가 없으니 무기력한 방콕 예술인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필자의 작업은 주로 유년시절을 추억하며 성장일기를 쓰는 방식이었다. 주로 여행과 자연에서 떠올린 과거의 그 시간과 공간, 빛바랜 에피소드에 깃드는 작은 상념들까지도 아낌없이 화폭에 담는다. 하지만 늘 갈증이 났다. 같은 방식의 반복이 원인이었다는 자가 진단은 지금 생각해보면 결코 오진이 아니었다. 뒤늦게 유학을 결심했던 것은 창작자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종의 한계상황이 극에 달했고, 동어반복만큼 고통스럽고 지루한 것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성장일기의 한 시퀀스(Sequence)를 접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또 다른 세계가 필요했다고나 할까.

파리 유학시절을 떠올려본다. 공항에서의 그 짧은 순간을 제외하면 파리지엥(Parisien)의 모든 것이 숨이 막힐 만큼의 거대하고도 새로운 관문으로 다가왔다. 물론 단순 여행자의 시선이 아니었던 점도 있었겠지만 돌이켜보니, 즐기면서 체득하기에 대한 학습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탓도 있었던 것 같다. 문화적 이질감과 그로 인한 소외감에 힘이 들었지만 그렇게 가라앉았던 일상들이 오히려 추진력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찾아왔다. 바로 체류기간에 개인 초대전[En face de la vie : 세상을 마주할 때]을 열게 된 것이다.

현지인들은 이방인의 심경을 자신들의 풍경에 담은 그림을 어떻게 볼지 궁금했다. 설령 단순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호기심으로 미술관을 찾았다고 해도 궁극은 그런 식으로 평가되고 귀결되지 않기를 바랐던 욕심이 있었다. 누구는 전자의 것으로 또 누구는 전혀 다른 식으로 감상의 변을 내놓았다. 전시가 끝날 무렵이 되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천년의 고도' 나의 고향 경주의 작업실에서 밤낮을 잊은 채, 작업에 몰두하던 때가 까마득한 과거의 일처럼 아득했고 몹시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생각없이 바라보았던 우리 땅의 풀 한 포기가 내게 그토록 소중했던 적이 있었던가? 귀국 후 한참 만에 자신에게 던져보았던 이 질문은 두고두고 지금껏 동기유발이 되고 있으니 소위 본전은 뽑은 셈이다.

그곳이 낯선 곳이라면 우리는 그 대상들의 진가가 어떻든 간에 속절없이 무기물 취급을 해 버릴 때가 많다. 일종의 '방어기제'라고나 할까. 그런데 온 세상이 바이러스에 감금되어 버린 지금이야말로 그럴 개연성 또한 더 번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그 속에서 유기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파리지엥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신수원 제공
파리지엥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신수원 제공
최근 초대전
최근 초대전 '안단테'에 전시된 신수원 화가의 작품. 고래 등 위의 기와집이 이채롭다. 신수원 제공

최근 개인전 [Andante : 삶의 템포]는 그렇게 달라진 세상에 대한 자구책의 하나였다. 느린 삶의 양태와 '멈추니 비로소 보인다'는 말의 의미도 자연스레 다가왔다. 생존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이웃들에겐 또한편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예술가들은 어쨌든 예술적(?)으로 살아내야만 한다.

삶의 보폭이 느린 나라 슬로베니아는 지난 5월 중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코로나 종식을 선언했다. 부러운 일이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슬로베니아는 '꿀벌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강한 꿀벌의 생태가 자연과 인간의 생명을 연결하듯, 우리는 지금 단절된 이 세상을 이어줄 어떤 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날들에 살고 있다.

서양화가 신수원
서양화가 신수원

언젠가는 이런 암담한 날들조차도 추억하는 때가 오겠지만 한꺼번에 몰아 써 치웠던 개학 즈음의 일기처럼 빨리 쓰고 덮어버리고 싶은 시간이다. 그럼에도 예술가로서 '이 가혹한 시간을 어떻게 매듭 지을까'를 생각해 볼 때가 많다. 초현실적일 정도로 전례없던 이 '뜻하지 않던 세상의 풍경'이 하루빨리 지나가고, 훗날 그저 나의 화폭에서 신박하게 '데페이즈망'(환경의 변화, 낯선 느낌, 고향으로부터의 추방) 되기를 바란다.

신수원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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