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천교에서] 용서받지 못한 자

입력 2020-11-08 05:00:00

지난 7월 10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 빈소에 고인의 영정이 놓여 있다. [서울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지난 7월 10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 빈소에 고인의 영정이 놓여 있다. [서울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속죄와 구원에 관한 이야기다. 과부 신애(전도연)는 하나뿐인 아들마저 유괴범에 의해 잃는다. 절망한 신애는 기독교에 감화되고서 '원수도 사랑하라'는 신의 뜻에 따라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교도소 면회실에서 마주한 유괴범은 "하느님께서 이미 저를 용서하셨다"고 먼저 고백한다. 용서한 사람은 없는데 용서받은 사람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애는 유괴범의 죄를 제멋대로 사한 신을 원망한다.

◆공지영 "주님께서 너그러이 안아주실 것"

여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전직 비서 A씨는 현재까지 박 전 시장을 용서하지 않았다. 고소 직후 박 전 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탓에 '용서할 수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적확해 보인다. 무엇보다 박 전 시장이 남긴 짧은 유언을 보면 A씨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공관 서재 책상 위에서 발견된 박 전 시장의 유서에는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 화장해서 부모님 산소에 뿌려 달라. 모두 안녕"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든 분들에게 죄송할 뿐 A씨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었다.

박 전 시장의 장례는 사상 첫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러졌다. 코로나19 확산 우려에도 5일장 동안 2만여명의 조문객이 빈소를 다녀갔다. 여권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한 집단 추모 분위기 속에서 친여 성향의 공지영 작가는 박 전 시장을 향해 "주님께서 너그러이 안아주실 것"이라고 했다. 피해자 의사와 무관한 용서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N차 가해의 시작, '피해 호소인'

민주당은 전직 비서 A씨를 피해 호소인 또는 피해 고소인으로 칭했다. 피해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기에 피해자보단 피해를 호소한다는 의미의 피해 고소인이 더 바람직하다는 논리였다. 당시 이해찬 대표의 "피해 호소인의 고통에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는 발언에 '사과 같지 않은 사과'라는 비판이 거셌다.

A씨를 향한 N차 가해는 계속됐다. MBC는 신입사원 채용 시험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문제 제기자를 피해자라고 칭해야 하는가, 피해 호소자라고 칭해야 하는가 (제3의 호칭도 상관없음)'라는 논제를 냈다. 2차 가해라는 비판이 잇따르자 응시자들에게 현금 10만원씩 쥐여주고 재시험을 치렀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맑은 분이었기 때문에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며 되려 박 전 시장의 도덕성을 치켜세웠다. 역사학자 전우용 씨는 "그가 두 여성(아내와 딸)에게 가볍지 않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안다. 그가 한 여성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아직 모른다"며 박 전 시장을 두둔했다.

12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위해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12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위해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지난 7월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한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지난 7월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한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에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원인 제공 보선에 후보낸다는 민주당

N차 가해는 박 전 시장의 사망으로 야기된 내년 보궐선거에 민주당이 후보를 내겠다고 하면서 절정을 맞았다. 최근 민주당은 2015년 문재인 당 대표 체제 때 만든 당헌 96조 2항, 즉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등 중대한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해 재보궐 선거를 하는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뒤집었다.

이낙연 대표는 "유권자 선택권을 존중하는 것이 공당의 책임 있는 자세다. 철저한 검증과 공정한 경선으로 가장 도덕적이고 유능한 후보를 찾아 유권자 앞에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피해 여성께 마음을 다해 사과드린다"고 했다. 피해 호소인으로 불리던 A씨는 선거가 임박하자 돌연 '피해 여성'으로 돌아왔다.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은 838억원이 소요되는 내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두고 "큰 예산이 소요되는 사건을 통해 국민 전체가 성인지성에 대한 집단학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역으로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발언 하루 만에 이 장관은 공개 사과했지만 정부·여당이 박 전 시장 성추행 의혹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7월 10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서울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7월 10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서울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A씨는 최근 이낙연 대표를 향한 공개 질의에서 "피해 여성께 마음을 다해 사과드린다고 말씀하신 바 피해 여성에 제가 포함되는 것이 맞는가. 도대체 무엇에 대하여 사과하신다는 뜻인가"라고 반문했다. 사과받은 사람은 없는데 사과한 사람은 있다는 것이다. 박 전 시장의 자살로 진실 규명은 사실상 요원한 가운데 오는 9일로 박 전 시장 사망 넉 달 째가 된다. 공지영 작가의 바람대로 박 전 시장은 주님 품에 안겨 있을까. 다만 분명한 건 A씨에게 박 전 시장은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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