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조정래 작가는 최근 등단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그는 150여만 명에 이르는 친일파를 단죄해야 하는데, "토착 왜구라고 부르는 일본 유학파,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 무조건 다 민족 반역자가 된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국수주의 또는 종족주의는 종종 사회의 흉기가 된다는 것을 세계사는 가르쳐줬다. 조 씨의 주장은 거의 망언에 가까운 내용이니, 일본에 유학했다고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가 된다는 한심한 기준으로 보면 항일운동하다가 옥사한 윤동주 시인도 도시샤(同志社)대에서 유학했으니 민족 반역자다.
고구려 중심의 민족사관을 가진 함석헌 선생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나왔으니 친일파. 릿쿄(立敎)대 대학원을 나온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의 주역 중 한 명이자 한국 종북 세력의 거두 박성준 교수도 친일파. 일본 여자와 결혼한 진중권 전 교수는 그럼 아예 일본인 그 자체가 되나? 이러니 "딸을 일본 극우파가 세운 고쿠시칸(国士舘)대로 유학 보낸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숨은 토착 왜구였네!"라는 조롱이 나오는 것이다.
진중권은 조 씨의 이런 주장에 대해 '광기'에 가까운 얘기라고 비판했다. 이에 조정래는 KBS 라디오 '주진우 라이브'에 출연, "저는 그 사람한테 대선배"라며 "인간적으로도 그렇고 작가라는 사회적 지위로도 그렇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개했다. 논쟁을 하다가 갑자기 나이·선배 타령 하는 것도 대단히 '꼰대'스럽지만, 조정래는 자기 스승인 서정주 선생을 격하게 비판하지 않았나.
조정래의 선친은 일본에서 일본불교 교육을 받고 와서 일본식 대처승 풍습을 따라 부인을 얻고 애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조정래였다. 해방 후 일본식 불교의 영향력을 줄이고 일본식 대처승 제도를 약화시키기 위해 전통적인 비구(比丘·독신자)승적인 조계종 중심의 한국불교로 이끈 사람은 바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었다. 조 작가 선친은 일본 유학생이니 그의 주장대로라면 졸지에 자기 부친이 친일파가 되는 것이다.
덧붙여 조 작가는 '태백산맥'을 "국민 90%가 읽었고" 그 소설이 가진 "'오늘의 현실성'이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온 비결"이라고 얘기하니 나가도 너무 나갔다. 소설 태백산맥은 허구에 기초한 그야말로 소설이라는 근래 학술 연구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역사소설이다 보니 역사적 사실과 틀리는 부분이 너무 많다. 역사관도 매우 편향적이다. 학자들의 반론에 조 씨는 논리적·실증적 재반론 대신에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에 대해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 같은 친일파"라는 비방으로 답해 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전 유성구 소재 모 서점에서는 일본 작가가 쓴 소설을 모아둔 서가에 '왜구소설'이라는 팻말을 붙였다.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는 장난이나 페이크뉴스로 알았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한국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 등 일본 작가들의 소설과 여타 문학작품들이 큰 인기를 끌고 많이 팔린다. 그런데 일본 작가들의 소설을 '왜구소설'이라고 하면 그 소설을 번역하고 출간하는 사람들은 물론 읽는 독자들은 다 '왜구'를 사랑하는 민족 반역자 겸 친일파가 돼 버리는가. 그 서점은 아예 일본 작가의 책들을 팔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잘 팔리는 '왜구소설'을 판매해서 돈은 벌고 싶나 보다. 그렇게라도 하면 자기가 줏대 있는 애국자라는 생각이 드는가 보다. 세계적 조류에 뒤떨어진 종족주의에 기댄 정신적 자위행위를 통해 쾌감을 얻는 전형적 방식이다.
일본을 향해 '죽창을 들라'는 등의 반일 선동과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일본제를 더 선호하는 역설은 이미 뉴스거리가 안 될 정도로 흔하다. 죽창 선동을 한 조국 전 법무장관은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정점일 때 기자회견에 일본제 볼펜을 들고 나왔다. '나의 반일 감정도 어쩌지 못하는 부드러운 필기감'이라는 광고 카피로 그 일본 회사의 모델로 출연해도 될 만큼 그 볼펜은 자연스럽게 '명품'으로 널리 선전이 됐다. 반일 감정 선동과 중국 추종에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도 집에서 쓰는 세컨드 카(second car)는 일제 고급 렉서스 차량이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이런 수준의 반일 종족주의는 탈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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