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서보 미술관' 예천 건립 소식을 듣고

입력 2020-11-08 16:03:38 수정 2020-11-08 18:52:20

이보경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팀장

이보경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팀장
이보경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팀장

박서보 미술관이 경북 예천에 건립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국 화단의 거목, 추상미술의 대표 작가 박서보의 미술관을 예천에 짓는다고? 그 가벼운 궁금증은 박서보 화백의 고향이 예천이라는 말에 금세 사그라졌다.

이 소식을 듣고 비록 엉뚱한 비약일지라도 그의 작품과 예천 사이 형성되는 묘한 일치감 위에서 설렘과 기대감을 피워낸다.

거기에서 어느 농부가 정성스레 갈아 놓은 고랑과 이랑을 발견하고, 긴 세월이 흐르고 흘러 만들어낸 강줄기를 떠올리고, 과녁을 향해 수없이 달려간 활이 가른 공기를 그려 본다.

박서보 화백은 1931년 예천군 은풍면에서 태어나 195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작가뿐만 아니라 교육자로, 미술운동가이자 예술행정가로 힘차게 달려왔다. 청년 박서보는 기성 미술계에 저항하는 1956년 반국전 선언과 함께 화단에 데뷔한다. 이듬해 그는 한국현대미술가협회의 전시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사 최초의 표현적 추상회화, 즉 앵포르멜(informal) 양식의 작가로 평가된다.

박서보 화백은 20대 초반에 겪은 한국전쟁의 상흔을 내면화하는 앵포르멜 작업의 실험을 이어가며 '원형질' 시리즈와 한국성·민족성을 담은 '유전질' 시리즈를 발표해 한국 화단에 추상미술 운동 바람을 일으킨다. 그는 1967년부터 '그리는 방법'이라는 의미의 '묘법'(描法) 시리즈를 통해 본격적으로 기하학적 추상을 이어 나간다.

서구 미술을 모방 수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찾고자 했던 박서보 화백은 단색화 태동을 이끈 산파로서 단색화의 원류인 1970년대 초기 '묘법'에서 한국적 모노크롬의 절제와 여백을 실현한다. 이후 1980년대 한지와 모노톤의 색채를 사용하여 화면의 마티에르가 드러났던 '묘법' 시기를 거쳐 1990년대에 손의 흔적 대신 막대기 같은 도구로 한지를 밀어내며 단순화된 직선의 요철을 만들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박서보 화백의 단색조 묘법은 다채로운 색을 입는다.

그가 공기의 색, 자연의 색, 치유의 색이라고 일컫는 색을 입힌 '묘법'은 회화의 색채가 전하는 시각적 즐거움을 통해 작가 자신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위안과 감동을 전한다. 방법의 변주가 끊임없이 시도되는 과정에서 세계적으로 한국미술의 단색화 열풍이 불고 이 강렬한 흐름에서 박서보 화백은 한국미술을 그 중심에서 견인한다.

미술관을 짓는 것은 멋진 외관을 가진 건물을 하나 세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를 전승하고 현재를 사유하며 미래를 교육하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기도 하다.

인구 5만5천여 명의 작은 고장인 예천에 박서보 미술관을 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묻는다면 한국 현대미술 운동의 선두에서 변화와 정립의 시대를 이끈 박서보 화백의 인생과 화업은 한국미술사의 궤적과 함께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기에 박서보 화백을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시도는 한 예술가를 에워싸는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다.

훗날, 박서보 미술관에서 또 다른 미래의 화가나 건축가가 성장하고 그 무엇이 됐든 상상하고 꿈을 꾸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찾아오는 장소로서 미술관,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한다는 의미는 그것을 통해 이뤄질 많은 긍정적 결과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포함한다.

더욱이 그 시도가 작가의 고향에서 이뤄진다면 더없이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어린 박서보가 예술적 감성을 키웠던 곳에서 그가 바라보고 탐구했던 이상의 세계를 작품으로 만나는 경험을 서둘러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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