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음악사, 본영당서점, 대구서적, 계몽사서점, 한일미유주식회사, 호텔금호, 귀빈예식장, 고려예식장, 명성예식장, 동아숙녀학원, 우일라사, 금성사진관, 중앙체육용구사, 뉴욕제과, ○○백화점, ○○건설, ○○은행, ○○윤활유, ○○상사, ○○치과, ○○양복점, ○○미용실….
원로 예술가들로부터 받은 공연 팸플릿들을 넘기다 보면 이런 상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공연 제작비를 후원한 곳들로,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는 기업도 있지만 사라진 이름들도 많다. 이들은 공적인 제작비 지원이 없던 시절에도 예술 활동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준 또 다른 힘이었다.
향토 문화예술의 토대를 닦은 원로 예술가들은 지역 경제가 넉넉하지 못했을 때도 예술가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고 회고했다. 바리톤 고(故) 이점희 선생님의 아들 이재원 씨는 "아버지께서는 늘 영선못 근처 집에서부터 향촌동까지 걸어 다니면서 언론사와 병원, 악기사 등을 찾으며 공연 후원을 부탁하곤 하셨다. 예술에 대한 확신이 있으셔서 가능했던 것 같다"고 했다.
1964년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창단되기까지, 1957년 대구현악회 창단에서부터 대구교향악단, 1958년 대구관현악단, 1962년 대구방송관현악단으로 형태를 바꾼 가장 큰 이유도 재정난이었다. 대구시향 초대 지휘자 고 이기홍 선생님은 생전에, 한일미유주식회사 하영수 사장의 도움이 가장 컸다고 회고하곤 했다. 하 사장은 1958년 대구관현악단 시절부터 만 5년간 후원했고 대구시향 창단 때는 악기까지 구입해서 기증했다.
1981년 대구시립합창단 창단을 이끈 지휘자 장영목 선생님은 "1960년대부터 민간 합창단을 이끌 때 옛 고려예식장 우종묵 대표가 20여 년간 연습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도와줬다. 그의 도움이 없었으면 합창 운동은 물론, 시립합창단 창단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작곡가 임우상 선생님은 대관료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정식 공연장이 지어지고 난 뒤부터였다고 했다. 그 전에는 팸플릿 제작비가 제일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다음이 연주자 출연료였는데, "대부분 교통비 정도밖에 주지 못했다"며 "지역의 서점, 악기사, 출판사 등에서 십시일반 후원해 줘서 공연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음악 신인을 발굴하는 콩쿠르를 열 때도 상금은 별도로 줄 수 없었고 출판사에서 후원으로 받은 악보가 큰 상품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고 이필동 선생님을 도와 연극 활동을 한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 관장은 "1980년대까지 대구의 극단은 동인제 극단 위주였기에 참여자들이 제작비를 나눠 부담했다. 그래도 부족한 비용을 메우기 위해 후원자를 찾아다니기 바빴고, 대부분 포스터 제작비로 썼다. 표도 열심히 팔았다"고 말했다.
1970, 80년대 공연을 만들기 위해 받은 후원금은 한 곳당 대략 2만~10만원 선. 물론 화폐 가치가 지금과는 다르지만, 팸플릿 뒤에 빽빽이 적힌 상호들을 보면 이런 크고 작은 후원금들이 모여 한 편의 공연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기전 대구시립무용단 초대 안무자는 "다른 장르 예술인들이 서로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줬다. 방송국과 무용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배경으로 조각가 고 홍성문 선생, 고 정점식 화백 등이 작품을 찬조해줬다. 남성 무용수가 부족하던 시절, 그 역할을 메워준 사람들은 바로 지역의 젊은 연극인들이었다. 나도 발레학원을 운영할 때 학부모들의 도움을 받아 크고 작은 공연을 후원하곤 했다"고 말했다.
기업과 동료 예술가들 외에 예술인들의 가장 큰 후원자는 바로 관객이었다. 출연료 대신 받은 입장권을 구입해준 사람, 그리고 공연장을 직접 찾아 표를 구입해 객석에서 응원의 박수를 보내준 관객들이 그곳에 있었다.
오랜 세월 예술가들의 가장 큰 소원은 '돈 걱정 없는' '안정적인' 예술 활동이었다. 지금은 문화예술 후원을 위한 다양한 법적 기반이 마련됐고 지원의 규모와 종류도 다양해졌지만, 예술인들은 여전히 어렵다. 예술 행위를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제대로'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유'무형의 비용이 꽤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코로나19 확산과 더불어 경기 침체로 문화예술에 대한 공공과 민간지원이 위축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다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역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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