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마감 - 김성민 시인· 도서출판 브로콜리숲 대표

입력 2020-10-04 14:30:00

김성민 시인·도서출판 브로콜리숲 대표
김성민 시인·도서출판 브로콜리숲 대표

또 한 번 '마감'을 들여놓았다. 아버님 댁에 놔드려야 할 보일러도 아닌 원고 마감을 말이다. 마감을 고이고이 두 손으로 받아들었을 때마다 몸서리쳐졌던 경험이 몸속 깊이 체득돼 있는데도 늘 이렇다.

원고청탁이 올 때의 상황은 대충 이러하다. 설상가상의 일처럼 좀 한가하거나 심심하거나 할 때보다는 뭔가에 좀 쫓기는 듯한 느낌일 때 오는 경우가 많다(기분 탓일 수도 있었겠다). 전화나 메일 문자가 불현듯 오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순간 이리저리 머리를 바쁘게 굴리게 된다. '출간해야 할 책들이 있는데 글 쓸 시간을 낼 수 있을까?' '저번 청탁 원고도 손 못 대고 있는데 또 청탁을 받아도 될까?' '지난주에도 겨우 마감 지켰는데 이번에는 거절하는 게 어떨까?' 하지만 깊은 고민 끝에 내리게 되는 결론은 '언제 또 이런 원고 청탁을 받아보겠어.' '늘 걱정했지만 어떻게든 돼 왔잖아'라는 아주 긍정적인 분위기가 온몸을 감싸오고 무엇에 홀린 마냥 '오, 예'하고야 만다.

그때부터 끙끙 앓는 시간이 시작된다. 시곗바늘은 째깍째깍 행진하고 세상은 빙글빙글 잘 돌아가는데 혼자만 뚝 떨어져 무인도에 갇힌 꼴이 된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지인들은 '저 친구 어디 아픈가?' '뭐야, 저 친구 사람이 좀 변한 거 같아'와 같은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그럴수록 나는 걱정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급기야 밥맛을 잃기도 하고 괜히 술잔을 기울이기까지 한다. 할 일이 눈앞에 있는데 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 같지만, 실제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른다. 더 나아가 잘 안 하던 집 안 청소며 화장실 청소까지 해대기도 하는데 아시다시피 병세는 자꾸 깊어만 간다.

마침내 마감 날짜가 이삼일 안으로 좁혀져 온다.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이 뒹굴뒹굴 온 방바닥을 샅샅이 훑고 다니던 몸을 추슬러 책상 앞에 앉히게 된다. 그렇다고 기다렸다는 듯 글이 시작되지도 않는다. 다시 기이한 일들을 하게 된다. 책상 위 연필이며 지우개, 널려 있는 책들이 뭔가 우주의 질서를 흩트리고 있는 존재들 같아 보인다. 견딜 수 없다. 책상 서랍을 뒤집어엎기도 한다. 메모장에 적어둔 메모들은 왜 거기서 나오는 건지…. '이걸 해준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 '이 친구 가게는 괜찮나, 궁금한걸.' 오랜만에 하는 통화는 길어지고 이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 엄중한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드디어 내일 아니 열 몇 시간만 있으면 마감이다. 큰일이다. 비장하게 집을 나온다. 진한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작업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는다. 컴퓨터에 빨간불이 들어온다. '삐' 준비음을 내는 컴퓨터. '윙' 컴퓨터 돌아가는 소리. 모니터에 커서를 움직여 클릭한다. 하얀 화면이 열린다. 그리고 자판 하나를 '탁' 두드린다.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늘도 기적이 일어났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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