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더 작게 듣겠습니다

입력 2020-09-29 05:00:00 수정 2020-09-29 06:19:18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28일 밤 정부과천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28일 밤 정부과천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이 나라 땅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운명이 정해진 사람이 있었다. 오로지 주인이라는 사람을 받들어 모시고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 운이 나쁘면 다른 집으로 팔려도 갔다.

특히 아이를 낳아 본 적 있는 10대의 몸값이 가장 비쌌다. 이들은 양반의 재산 늘리는 좋은 수단도 됐다. 그러다 삶을 마치면 번듯한 무덤조차 없었다.

죽어도 따뜻한 밥 한 숟가락, 깨끗한 물 한 그릇 떠 놓고 제대로 기리는 사람 없는 존재, 바로 종, 즉 노비였다. 조선조 한때 종의 인구가 전체의 반을 넘었고, 당시 노비법은 더없는 악법으로 평가됐다.

물건과 동물처럼 팔리고 밑바닥 삶이 강요된 종은 또 옛날 양반 계급 집안 문중을 지킨 일꾼이자 후손을 경계하는 희생물도 됐다. 그 한 사례는 주인이 지은 잘못과 죄를 대신해 매질이나 처벌을 받는 일이었다.

나쁜 짓은 주인이 저지르고 벌 받는 운명은 바로 애먼 종이었다. 일부 '뼈대' 있는 집안에 전하는 제사 관련 문헌에 나오는 '후손의 한 번 제사 불참 벌칙은 쌀 한 말, 두 번은 두 말, 세 번은 노비 매질할 것'이란 기록이 그렇다.

이런 종의 신분 해방은 공교롭게도 양반 계급이 차별한 서자 출신 경북 경주 최제우가 동학(東學)을 창시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동학혁명과 일제 식민지배,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으로 노비는 없어졌고, 평등 사회는 어렵게 이뤄졌다.

우리의 평등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사회의 역사는 이처럼 짧다. 그리고 마침내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 취임으로 우리 사회는 비로소 그처럼 바란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운 시대를 맞았다.

이후 사람들은 앞으로 '평등, 공정, 정의'의 사회는 문 대통령 전후로 나눠지리라 믿었다. 그렇게 보낸 문 정부 임기 5년도 이제 절반을 넘어 퇴임 2022년 5월까지 채 2년이 남지 않았다. 그 사이 문 대통령이 외친 '평등, 공정, 정의'의 가치는 아직 유효한가.

답은 "글쎄요"가 됐다. 정부와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 불평등,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김경수 경남도지사 등 측근 세력의 불법 비리 감싸는 재판의 불공정, 2017년 낚싯배 침몰 사망자에 묵념하며 알뜰히 챙기던 모습과 달리 북한군 총격에 공무원이 서해 고혼(孤魂)이 돼도 침묵하는 불의(不義)와 식어버린 대통령의 애정에 국민은 당황스럽다.

아무래도 문 정부의 풍성한 언어의 효과는 생명력이 그리 길지 않은 듯하다. 또한 빈 곳간에 빚을 내서라도 환심을 사는 듯 '베푼' 자선을 '자식보다 낫다'며 반기는 환영파의 큰 목청도 있지만 아예 받지 않거나 걱정하는 우국파의 한숨 소리도 깊어만 간다.

공직 출신의 한 기업인은 나라 곳간이 위험하다며 정부가 처음 '기부'를 바란 것처럼 아예 재난지원금 신청을 포기했다고 털어놓았다. 대구시청의 한 퇴직 공무원은 정부 지원 받으려 통장 잔고를 비우는 부모의 돈을 받고도 "이래도 되나" 하며 걱정이란다.

세상을 바꾸고 허무는 일에는 어떤 앞선 낌새나 조짐(兆朕)이 될 만한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조짐의 소리는 크지 않고 잘 들리지도 않을 수 있다. 또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흔히 놓치거나 깨닫지 못하기 일쑤이다. 오죽했으면 대구시의회 경우, 지난해부터 구호를 '시민의 작은 목소리도 크게 듣겠습니다'로 정해 작은 시민 목소리조차 크게 들으려 할까.

그런데 정작 나라를 맡은 문 정부는 넘치는 불길한 낌새에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이러다 못된 주인 탓에 애꿎은 종이 매 맞듯, 국민의 크고 작은 비판적인 소리에 귀를 닫고 더 작게 들으려는 일부 그릇된 무리 아래 서해 고혼의 희생자 신세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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