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전쟁에 빛난 대구 판결

입력 2020-09-18 06:30:00

문화재청이
문화재청이 '대구 동인초등학교 강당'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지난 15일 밝혔다. 사진은 대구 동인초등학교 강당. 1935∼1937년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 중구의 동인초등학교 강당은 건물에 필요한 층고 확보를 위한 이중 경사 지붕 등 오래된 건축 기법을 사용한 건물이다.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대구는 짧은 한때 나라의 수도였다. 1950년 6·25전쟁 시기 34일간 그랬다. 대통령이 머물렀고, 대통령이 부산으로 떠난 뒤에도 전쟁 관련 여러 기관과 단체들은 대구에 있었다. 그러니 공공시설은 물론 계산성당 안에 육군본부 정훈감실이 마련되었고, 동산병원에는 국립 경찰병원 대구분원이 들어서는 등 여러 건물이 그렇게 쓰였다.

학교도 같았다. 계성학교에는 2군사령부가 자리 잡았고, 대구초등학교에는 육군병참실이, 수창학교와 효성초교에는 각각 육군헌병학교와 포로수용소가 마련되기도 했다. 학교 가운데 무엇보다도 대구동인초교는 한국 근대사 특히 군대와 사법 역사에 길이(?) 남을 국민방위군사령부 비리의 역사적 '명재판'이 열린 곳으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전쟁에서 밀리자 정부는 1950년 12월에 법을 마련, 17~40세 장정으로 국민방위군을 꾸렸는데 그 수가 50만 명에 이르렀다. 비리, 부패가 휩쓴 이승만 정부인지라 50만 장정에 쓸 돈은 정치권과 관료 뒷돈, 술값 등으로 흥청망청이었다. 결국 애꿎은 장정만 굶고 병들거나 얼어 죽었으나 숫자조차 알 수 없었다.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던 방위군 비리로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어쩔 수 없이 재판이 열렸는데 바로 대구동인초교 강당에서였다. 온 국민의 분노를 산 방위군 비리 사건 재판에서 간부 5명이 정권 비호의 온갖 풍문 속에 사형을 선고받고 1951년 8월 13일 대구 달서구의 앞산 자락 사형장에서 공개 총살로 삶을 마쳤다. 자신들이 자리했던 곳에서 받은 죄의 판결로 형장의 이슬이 된 셈이다.

당시 검찰관으로 엄히 죄를 따져 사형을 구형한 김태청 전 변협회장은 2003년 회고록에서 "법관의 양심을 걸고 법과 정의에 따라 소신껏 처리할 것을 다짐했다"며 "대한민국에는 법도 없느냐고 개탄했던 국민들도 그때서야 '그래도 법과 정의가 살아 있구나' 하고 안심했다"고 썼다.

이런 어두운 역사를 간직한 대구동인초교를 문화재청은 지난 15일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1935년 4월 문을 연 만큼 건축적 가치 등도 따졌겠지만 대구로서는 한국 군대와 법원 역사에 남긴 오욕(汚辱)과 공정 판결의 역사 현장으로 새길 만하다. 갈수록 정부와 사법, 입법부의 공정성 파괴와 편파성의 우려가 큰 요즘이라 그런지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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