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변관식(1899-1976) ‘단발령’(斷髮嶺)

입력 2020-08-30 06:30:00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수묵담채, 55×100㎝, 개인 소장
종이에 수묵담채, 55×100㎝, 개인 소장

변관식의 '단발령'이다. 그림 속에 날짜는 적어놓지 않았지만 생전의 마지막 개인전인 1974년 6월 '소정 동양화전'에 나온 76세 때 작품이다. 당시 32세였던 현대화랑(지금의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은 이 전시를 기획하며 변관식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6개월 간 정릉의 한 절에 화실을 마련해 주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집중적으로 작업할 수 있었던 덕분인지 변관식은 평생 몰두한 금강산화의 승화된 명작들을 그려내 이 전시는 그의 작품세계를 재평가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단발령'은 그 중에서도 백미여서 올해 5월 갤러리현대 창립 50주년 기념전에도 출품되었다. 올해는 소정 변관식의 44주기가 된다.

조선시대부터 20세기를 통틀어 변관식만큼 금강산을 많이 그린 화가도 드물다.


"어떤 사람은 나의 산수화는 금강산뿐이라고 하지만 사실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내가 평생 그려도 다 못 그릴 그런 장엄미를 갖춘 것이다. 금강산을 스케치해둔 것도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내 머리와 가슴 속엔 금강산의 기억과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나는 금강산의 어느 한 부분을 그릴 때마다 그 곳의 산세는 물론 바위의 생김생김과 물의 흐르는 방향과 물살의 세기까지 기억하며 그린다. 단원 김홍도와 함께 내가 가장 존경하는 화가인 겸재 정선이 금강산을 자주 찾고 많이 그렸지만 나도 8년이란 세월을 해동 제일의 산을 찾고 그를 30여 년간 그렸으니 그와 나는 이제 불가분의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정도는 되어야 산수화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변관식은 일본 도쿄에 1925-1929년 유학하며 '신남화(新南畵)'를 배우고 돌아왔다. 한국적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결론과 소명에 도달해 1937년 39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8년 동안 금강산 곳곳을 스케치했다. 그러고 나서 30년을 줄곧 금강산을 그렸으니 '그와 나는 이제 불가분의 하나'라고 자부할만하다. 이렇게 무르녹은 경지에서 나온 금강산화 중 하나가 이 '단발령'이다. 흰 화선지에서 은은한 담채와 먹빛의 산봉우리와 언덕이 솟아나고 잦아드는 허(虛)와 실(實)의 강렬한 대비 가운데 무수한 점들이 마치 산하와 대기에 어린 정령 같은 존재감으로 화면에 나부낀다.

지금은 북한 지역인 단발령은 이 고개에 올라서면 내금강이 한 눈에 들어와 겸재 정선의 '신묘년 풍악도첩'(1711년)에도 들어 있는 금강산 탐승의 명소였다. 단발령에서 일만이천봉을 바라보면 머리를 깎고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되었다고도 하고, 신라 말 마의태자가 이 고개에서 머리를 깎고 금강산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단발령(斷髮嶺) 내금강산(內金剛山) 하운출곡지도(夏雲出谷之圖) 소정(小亭)"으로 써 넣어 쨍하게 맑은 햇살아래 여름 구름이 골짜기에서 일어날 때의 풍경이라고 했다. 노란 두루마기에 갓 쓰고 지팡이 짚은 소정산수 특유의 할아버지 유람객들이 단발령 고갯마루를 향해 바쁘게 가고 있다. 모두 7명. 더 많은 풍경을 섭취하려 전국을 다니며 사생하던 그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점경인물인 것 같다.

변관식은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데가 없어 어디 하면 그곳의 강과 산, 나무, 돌, 집들이 훤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실지로 보고 스케치했던 곳이 아니면 그리지 않는다고 했던 실사(實寫)의 화가였기에 만년에 이르러 사실(寫實)과 사의(寫意)가 그윽하게 융합된 이러한 조형언어에 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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