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죽음에 대한 상념

입력 2020-08-14 13:24:01 수정 2020-08-14 18:47:43

김용락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원장·시인
김용락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원장·시인

죽음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다양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죽음에 대한 가장 절대적이고 예각화된 이데올로기는 종교가 아닐까. 내 생각으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죽음을 전제로 하고 죽음에 대한 탐구를 가장 본질적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고 본다. 그다음으로 문학이라든가, 철학과 같은 인간의 정신 영역을 다루는 학문이 뒤를 잇는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을 통해 현재의 삶을 성찰하는 게 인간의 지혜이다.

나는 올여름 너무나 인상적인 세 죽음을 가까이서 목도했다. 세 사람 다 예순을 넘긴 나이어서 젊어 요절한 죽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애석함이 덜한 죽음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죽음이 그렇듯 죽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죽음과 혈육이거나 정신적으로 깊은 연대감이 있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비록 나이 든 죽음이라 해도 그 슬픔은 크게 줄지 않을 것이다.

김종철(1947~2020) 선생이 지난 6월 하순에 작고하자 그의 죽음을 알리는 한 유력 중앙 일간지의 헤드라인이 '한국 생태주의 운동의 대부'라고 붙였다. 이런 사회적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는 이 분야에 몰두했고 그에 상응하는 업적을 남겼다. '시와 역사적 상상력' '대지의 상상력'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등은 그가 남긴 저서의 제목이다. 이런 책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는 대지(大地)의 흙을 사랑했고, 근대문명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 많은 노력을 바쳤다. 그는 대구 영남대에서 20년 넘게 교수로 근무했고, 격월간 '녹색평론'이라는 기념비적인 잡지를 대구에서 창간했다. 그가 남긴 많은 육성과 저서를 통해 한 발언의 최종적인 의미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겸손'과 욕망의 자기 '절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런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남기던 그는 어이없게도 새벽 산책길에서 실족사한 걸로 알려졌다.

박원순(1956~2020) 선생은 사회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그 와중에 지난 7월 초 극단적인 방식으로 삶을 마감했다. 현재 그는 정치적 지지자나 반대자들에게 많은 논란을 제공하고 있지만, 그의 삶의 실존적인 측면만 보면 그는 농경문화의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1950년대 중반 이후에 출생한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신화와 같은 인물이었다. 양파 농사를 하는 지방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한국 최고의 명문고와 명문대에 들어갔고, 학생운동으로 제적되고 옥살이하고 사법고시를 패스해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가뿐하게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 권좌의 핵심인 검사를 곧바로 치우고 시민운동가로 '참여연대', '아름다운 가게' 등 그때까지 한국 사회가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이슈와 희망의 상상력을 우리 사회에 불어넣었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그가 언젠가 외국에 나갔다가 귀국하면서 수천 권의 책을 구입해 비행기 화물로 부치고 몸만 들어왔다는 기사를 읽고 너무 부러웠던 적이 있다.

서오년(1927~2020)은 나의 어머니다. 안동 낙동강 변의 조그만 산골에서 태어나 일제 식민지의 보국대 송출을 피해 열다섯 살에 결혼해 우리 6남매를 두셨다. 그 시대의 어머니들이 다 그렇듯 가난하고 힘겨운 일생을 보냈다. 흰 수건을 쓰고 긴 밭이랑에 걸터앉아 하루 종일 호미로 하염없이 밭을 매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하다. 유난히 삶과 자식들에게 집착하셨지만 마지막 2년을 치매로 요양병원에서 보냈고, 코로나19로 6개월은 자식들 얼굴을 화상으로만 보다가 가셨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다. 불쑥 예고 없이 오기도 하고 예견된 방식으로 오기도 한다. 이 죽음에 대해 명복을 빌면서 현재의 내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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