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한국인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연일 안타까운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근래 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그랬고, 지난주 대구에서는 일가족 3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한다. 경위야 어떻든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것이 순리이다. 그래도 운명의 여신은 "쓸모없는 실오리는 그대로 두고 찬란한 희망의 실을 일찍 잘라 무덤으로 데려간다"(괴테, '파우스트')고 했으니, '일찍 무덤으로 데려' 가진 박 시장은 적어도 추종자들에게는 여전히 '찬란한 희망의 실'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라틴어 경구에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 죽음이라면 가장 불확실한 것은 죽음의 때'라는 말이 있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존재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도 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에게도 삶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철학이라고요! 철학으로 줄리엣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도움도 납득도 안 됩니다. 관두세요." 아무리 고상한 철학이라도 생명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삶과 죽음에 대한 헤세의 예지는 놀랍도록 날카롭다. '크눌프'에서다. 삶은 밤하늘의 불꽃놀이와 같은 것, 밤하늘의 불꽃은 피었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즐거움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두려움도 함께 느끼도록 하는 거야. 난 불꽃놀이를 정말 좋아해. 파란색 녹색 탄이 어둠 속 하늘 높이 올라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작은 곡선을 그리며 사라지지. 그 모습을 보노라면 즐거움과 함께 그것이 금방 사라지리라는 두려움도 같이 느끼게 돼. 이 두 가지 느낌은 서로 연결된 것이라서 그것이 오래 지속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지."
사회를 들쑤셔놓은 박 시장의 자살 사건은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난 고 백선엽 장군의 '조용한' 죽음과 오버랩되었다. 서울시장(葬)이니 대전현충원이니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만의 삶, 자기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이미 100여 년 전에 릴케는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은 자기만의 고유한 삶처럼 점점 드물어질 것"(말테의 수기)이라고 썼지만, 언젠가부터 우리는 삶으로부터, 또 죽음으로부터 점차 소외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과일 속에 씨가 들어 있듯 사람도 속에 죽음을 간직하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작은 죽음을, 어른들은 큰 죽음을, 여자들은 자궁 안에, 남자들은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독특한 위엄과 말없는 자부심을 주는 죽음이었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죽어서도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였다. 그에 대한 대중적 호감이 아름답지 못한 일로 갑자기 멈췄을 때, 문득 필자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지나친 숭배의 대상은 늘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소박하고 평범한 우리 모두가 각자 행복의 대장간이라는 옛 사람들의 지혜에 새삼 경의를 표하고 싶은 수요일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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