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허름한 셔츠를 걸쳐 입은 김 노인은 호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다.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고는 불붙일 생각을 않고 마을 쪽을 내려다본다. 가득히 연민을 담은 눈이다.
"자넨 잘 모를 거야. 어째서 우리 조상들이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와 마을을 이루셨는지. 그분들이 어떻게 살다가 돌아가셨는지."
김 노인은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하기야 나도 어렴풋이 짐작만 해왔었던 일이었지. 그런 것들을 알기엔 너무 어렸었고. 또 알기도 전에 난 고향을 등지고 도회지에서 살았거든."
- 노매실(老梅實)의 유래는 멀리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삼한시대 '조문국'(召文國)이라는 아주 작은 부족국가가 있었던 자리였는데 서기 85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지형은 마을 북쪽에 산이 있었는데 봉우리 모양이 마치 매화(梅花)같다고 해서 노매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매화꽃이 떨어져 이룬 터라는 아름다운 인상의 마을로 불린다. 1737년 옥선달(玉仙達)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정착하였다고 하는 선비 마을이기도 하다. 행주 은 씨, 성주 도 씨, 효령 사공 씨, 안동 권 씨가 모여 살았으며 사공 씨가 토박이다. -
아득한 그 옛날의 골짜기를 품은 고향의 고갯마루에 되돌아 와 앉은 노인의 눈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 . . . 우리는 고향을 몰라도 너무 몰랐어.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도 좋을 고향을 그동안 멀리하고 살았으니까."
김 노인은 목이 잠겨 몇 번이나 침을 삼키면서 말을 잇는다. 그의 가슴 속에 일고 있는 회환의 물결을 조심스럽게 재우는 낮은 음성이다.
" . . . 참으로 오랜 방황이었지. 따지고 보면 난 그토록 긴 세월을 도회지 생활에 시달리며 살아 왔던 것 같아. 우린 이제까지 우리 자신을 너무도 몰랐었거든.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만 사로잡혀 헛된 신기루를 쫓고 있었던 게야."
"나이 육십이 넘도록 무엇을 했었단 말인가. 지금까지의 내 삶은 거의가 허깨비에 불과한 것이었어. 삼십여 년 선생 노릇을 해왔지만 글쎄,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철저한 지식의 전달자, 아니 지식의 장사치였던 것 같아. 교육자 행세를 하면서 말일 세."
나는 노인을 쳐다보다 말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마치 그의 벌거벗은 몸을 보는 것 같은 민망스러움에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비록 가난하였을지라도 이 마을에 선비 정신으로 바른 길을 사셨던 우리 조상 어르신의 삶에 비하면 나의 그것은 형편없이 초라한 것이었다네. 오늘이라도 내가 죽는다고 하면, 나의 묘비엔 무슨 말이 쓰일까! - 태어났다. 먹고 살았다. 그리고 죽었다. - 아무리 좋게 말해도 그 이상의 것이 아닌 것을 . . . 나의 생애는 이 세 마디 말로 충분하지 않겠나."
김 노인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팔뚝으로 쓱 문질러 대고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쥔다. 주름이 깊게 잡힌 구릿빛 얼굴하며 햇살에 번들거리는 마디 굵은 손가락, 가죽처럼 두터운 살갗 속에서 곡괭이로 밭을 일구려는 근육이 꿈틀거린다. 노인은 이제 누가 보아도 이곳 노매실 짝골마을의 농부이다.
"젊은이, 난 어려서 이 마을을 떠나 거의 반세기 만에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네.
웃어른처럼 부끄럽거나 후회되지 않을 죽음 - 그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 . . ."
그렇다! 나의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처럼 부끄럽거나 후회하지 않을 떳떳한 죽음, 그런 삶을 위해서. 나도 고향을 떠난 지 만 이십 년 만에 귀향을 한 것이다. 이 노매실 짝골마을에 한 줌 거름이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하여.
< 2 >
노매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내가 태어난 자그마한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지만 짝골마을의 좁은 길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긴 파충류처럼 꼬불꼬불한 길이 한낮의 호젓한 고요함 속에 산허리를 감고 있었다. 엊그제 내린 비에 패인 것일까. 골짜기로 굽어드는 비탈길은 헐벗은 망아지 잔등처럼 군데군데 쨍쨍한 햇살 아래 그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내가 떠나던 그때에도 짝골마을 길은 한바탕의 소나기에 토막 난 지네처럼 끊겨 있었다. 물살에 떠밀려 내려온 돌멩이들이 아무렇게나 길바닥에 나뒹굴었고, 황량한 들녘에는 뙤약볕에 사위어가는 풀잎이 빌빌 꼬이고 있었다.
가난한 부모와 가난한 이웃이 살았던 고향, 그러면서도 그 가난을 숙명처럼 불평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가던 고향. 온갖 자연의 재난과 밑도 끝도 없는 가난은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 마음은 고향 길 어귀에서부터 왠지 어둡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고갯마루를 넘어 마을 안에 들어섰다. 골이 드러난 초가지붕, 수숫대로 엮어 둘러친 금방 넘어질 듯 위태위태한 울타리. 마을 구석 꼬불꼬불 누비고 있는 고샅길, 역시 옛 모습 그대로였다. 잠시 나는 발걸음을 멈춰 섰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눈이 머물자 그 순간 가슴이 섬뜩해졌다. 어릴 적 그때의 아픔이 늦가을 호수 위에 번지는 잔물결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십 년 전, 나를 졸지에 고아로 만들어 버린 건 마을 저 계곡 중턱에 자리 잡은 마치 호랑이 같이 생긴 바위 형상이었다. 지금 그 바위는 없어졌지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그대로 남아있다.
소작농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던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에 찌들었던 삶에 대하여 어떤 아픔 같은 것을 감내하면서 커왔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아버지의 한숨 소리와 빈 수저를 달각거리던 어머니의 모습을 어렴풋하나마 제일 먼저 떠올린다.
허구한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끼니를 거르고 나서 혼자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 있노라면 허기에 차 눈만 말똥말똥 해지곤 했다.
가만히 이불을 젖히면 희미한 등잔불 아래 등을 보이고 있는 아버지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토해 내고 있었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니는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고는 구멍 난 양말을 깁고 있었다. 어쩌다 죽이라도 끓이게 되는 날이면 어머니는 멀건 밀기울 죽 두 그릇을 방 안에 들여 넣고는 혼자서 부뚜막에 앉아 숟가락을 빈 밥그릇에 달각거리고 있었다. 그 지겹도록 가난했던 긴 긴 보릿고개의 날들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시려오는 아픔 그것이었다.
"임자, 같이 묵게 들어 온 나 말이여."
아버지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지르면,
"난, 시방 군불 땜서 묵고 있잖우. 애하고 당신이나 어이 자시란 말요."
"어허, 참!"
마침내 아버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나 부엌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것이었고, 엉거주춤 일어선 어머니는 민망한 얼굴이 되어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도 슬그머니 숟가락을 떨구고 말았었다.
어머니는 어제 밤부터 복통을 일으켜 밤새도록 신음을 하며 부대끼었었는데 아침에는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이 너무나 창백했다.
어머니는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뱃살을 거머쥐고 아파하였는데 어린 내가 보아도 예사로운 복통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어무이, 나 학교 안가고 재 너머 의원 데꼴까 . . . . ."
내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묻자,
"어야, 내 새끼야!"
"걱정 말그라, 엄만 게안타."
어머니는 땀투성이의 얼굴을 겨우 치켜들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오히려 나를 챙기신다.
"밥 묵었으면 어여 학교나 가래이. 이번에도 백점 못 무마 패쥑일끼다."
나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책보를 허리에 동여매고 집을 나섰다. 그날이 바로 청소 당번이었던 나는 해가 기운 저녁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었다.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의 복통은 아침보다 훨씬 더해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하얗게 눈을 뒤집은 채 방바닥을 벌벌 기어 다니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나는 피가 바짝바짝 졸아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재 너머 한의원이 와서 침을 몇 대 놓고 단방 약 몇 가지를 달여 입가에 흘려 넣었지만 금세 와락와락 토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아버지도, 한의원도 어머니의 고통을 보고만 있을 뿐 속수무책이었다.
"아부지예, 빨리 어무이 업고 병원에 가. 병원에요."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 있는 아버지를 보채고 있었다.
"머라꼬?"
아버지는 금방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나를 돌아다보았다.
"퍼뜩 데꼬 갈끼다."
아버지는 그 때까지 병원 생각은 미처 못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병원이 있는 읍내까지는 재를 몇 개씩 넘어야 하고 산길로만 삼십 여리나 되는 먼 거리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사람이 금방 죽어 나가도 병원에 가는 것은 아예 상상도 못했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조급해져서 낚아채듯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아범, 어딜 가시려우. 난 이제 . . . "
어머니는 땀으로 멱을 감은 듯한 얼굴로 아무 힘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안 돼! 임자, 임자가 먼저 가마 절대로 안 된다카이!"
아버지는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마구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은 일제히 빳빳하게 곤두서서 무언가 와락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등에 업자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는 어둠 속을 뚫고 돌진하는 밤 열차처럼 무섭게 내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등에 업힌 어머니의 고통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모진 것이어서 몸부림 끝에 몇 차례나 길바닥에 굴러 떨어졌고 병원에 닿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버린 밤 한 시였다.
결국 어머니는 닫힌 의원 문 앞에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의사가 급성맹장염이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상여가 떠나는 날, 아버지는 실성한 사람처럼 몸부림치고 울부짖었다.
「에헤-야 넘자 넘어, 이제가면 언제 오나, 에헤-야 넘자 넘어, 인생일생 춘몽이드냐, 에헤-야 넘자 넘어, 이제가면 언제나 오나, 에헤-야 넘자 넘어, 에헤-야 넘자 넘어, 에헤-야 넘자 넘어,」
구슬픈 상여 소리를 따라 상여가 서서히 움직여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뒤에 엎드려 있던 아버지가 별안간 튕기듯 일어나 이승의 마지막 상여 끈을 붙들고 안간힘을 다해 놓지 않으려 했다.
"임자, 절대 못 간 데이. 절대 못 간 데이! 이날, 이때까지 평생을 묵고 싶은 것 한 번을 허리띠 끌러 넣고 묵어 봤냐. 입고 싶은 옷 한 벌을 맘대로 입어 봤냐. 못 묵고, 못 입고 살다가 가다니 원통해서 우째 눈을 감았다냐아. 임자아!"
아버지는 입에 허옇게 거품까지 물면서 상여를 붙들고 몸부림을 쳤다. 결단코 상여를 보낼 수 없다는 듯이. 상여를 흔들며 밀어내던 아버지는 마침내 기진하여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니를 안짝골 양지바른 골짜기에 묻어 두고 온 그날 밤, 우리 부자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연거푸 줄담배를 태우고 계셨고 나는 한쪽 얼굴이 이지러진 열 여드렛날의 달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놈의 마을에 리야까만 들어올 수 있어도 느그 엄니는 살았을 꺼 아이가."
아버지는 갑자기 태우고 있던 담배를 마치 이(虱)잡듯이 재떨이 위에 비벼 끄더니 불쑥 혼잣말을 내뱉었다.
"우째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을 거나. 쬐끔만 일찍 병원에 갔어도 살렸을 낀데. 우째서 사람이 다 죽어가는디도 멍청허게 이러고만 있었다냐 . . . "
"두고 보래이. 내 언제고. 저 노무 호랑이 바윗길을 허물어서 마실 앞에까지 차가 들어오는 신작로를 만들고 말 끼다."
아버지는 모질게 주먹을 오그려 쥐었다.
어찌나 단단하게 쥐었던지 팔이 떨리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뭐 있노. 이깐 놈의 마실 떠나 버리면 그만 아이가."
나는 아버지의 말에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니, 시방 머라캤노?"
내 쪽을 돌아보는 아버지의 눈길은 불처럼 확 타오르듯 번득거렸다.
"그만 자거래이. 쬐깐헌 것이 멀 안다구 . . . "
아버지는 돌아앉더니 다시 담배를 태워 물었다. 내내 무슨 생각을 한 것이었을까. 잠을 못 이루던 아버지는 새벽녘에 내가 잠든 사이에 기어이 밖으로 나가셨다. 맷돌에 우둘우둘한 요철을 낼 때 쓰는 정과 쇠로 된 지렛대를 어깨에 메고 호랑이 바위 고개를 오른 것이었다.
나는 오줌을 지리면서도 괴상망측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꿈을 꾸었었다. 하늘 가득히 까마귀 떼가 날아다니는 그런 소슬한 꿈이었다.
나는 비몽사몽 마당으로 나가 산으로 잇대어진 잡목 숲에 오줌을 내갈겼다. 그런데 갑자기 코앞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놀래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까마귀였다. 한두 마리가 아닌 까마귀 떼가 마당가 잡목 숲에 무슨 열매처럼 새까맣게 붙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돌멩이를 집어 들어 숲 속에 내던지자 까마귀 떼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바람을 가르고 날아올랐다.
새벽하늘에 퍼지는 그 불길한 울음소리와 푸드득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날개깃 소리는 나를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아부지예, 아부지이예."
나는 겁에 질려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없었다. 밖으로 나왔다. 변소에도 헛간에도 뒷마당에도 아버지는 없었다.
한참 뒤에야 나는 새벽 계곡을 울리는 망치 소리를 들었다. 다시 한 번 불길한 예감과 가슴을 후들후들 떨리게 하는 공포가 나를 휩쌌다. 나는 기를 쓰고 호랑이 바위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갯길 가운데 봉우리를 넘어서자 바위 꼭대기에 서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거기서 힘차게 정을 박아 넣고 있었는데, 막 동이 트려는 새벽하늘에 드러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무어라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별안간 호랑이 바위의 한쪽 모서리가 와그르르 무너지면서 아버지가 돌멩이처럼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다.
"으 – 아 – 악 - . . ."
아버지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계곡의 밑바닥으로 꺼져 내리고 곧 이어 엄청나게 큰 바위 떨어지는 소리가 산울림처럼 길게 계곡을 울렸다.
나는 부리나케 구르듯이 계곡을 타고 내려갔다. 아버지는 절벽 아래에 피를 쏟으면서 거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를 보자 아버지는 무슨 말인가 하시려는 듯 안타깝게 손을 저으면서 입을 힘없이 움직이시더니 갑자기 눈을 부릅뜬 채 꼼짝도 하지 않으셨다. 이내 손이 맥없이 땅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다부지게 내민 턱과 두 야무진 두 눈의 모습은 죽어서라도 마을 신작로를 결단코 내고야 말겠다는 완강한 의지로 굳어 있어 보였다.
나는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살며시 두 눈을 감겨드렸다. 그러나 감겨도, 감겨도 아버지의 눈은 감겨지지 않았다.
웃 이빨을 아드득 깨어 물고 있는 턱은 구리로 빗은 조각처럼 땅에 묻혀서도 영원히 견고하게 굳어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마을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마 새벽에 아버지를 부르며 산길을 타올라 간 내 뒤를 쫓아 온 것 같았다.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며 혀를 차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 게 아니라 울다 지쳐 마을 사람들의 우는 모습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물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버지와 같은 자신들의 운명을 탄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안짝골에 묻힌 어머니와 영겁을 마주보고 계시라고 바깥짝골 양지바른 곳에 뉘었다. 그리고 이튿날 한밤중에 나는 어미 잃은 망아지 새끼가 몸 둘 데 없어 도망치듯 천애 고아로 노매실 고향마을을 떠난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사흘만이었고 내 나이 열세 살 때였다.
< 3 >
이대로 고향에 몸담아 있다가는 어쩔 수 없이 가난을 대물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과 삶은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부딪혀가며 쟁취해야 한다는 나만의 어떤 신념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서 이를 악물고 굳은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자 했다.
다행히 나는 어느 광고 회사에 점원으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끼니를 해결하며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를 모두 마치고 또래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 일과 연관된 미술학 전공을 공부하게 되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대학을 졸업한 나는 시내 변두리에 조그만 광고 대행사를 하나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에 온 정열을 쏟았었다. 마치 그것이 내 삶의 의미이며 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일에 몰두했었고 제법 큰 업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학벌이나 경제적 능력 같은 것을 우선시 하는 사람들 눈에는 젊은 나이에 일찍 입신한 내가 전도가 유망한 청년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죽어라고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고향도 잊고 살았다.
그러나 광고 대행업이 어느 정도 안정된 궤도에 올라서고부터 갑자기 모든 일이 성에 안차고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과장된 광고 그림이나 무책임한 홍보 그림을 그리는 일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이십여 년 동안의 서울 생활에서 이러한 그림을 그리며 살면서 이루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순에 차고 생명이 없는 모방의 생활이었다. 나는 삶의 의미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도둑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면 캔버스를 메고 야외로 나갔었지만 팔레트에 물감을 이겨 넣기도 전에 짐을 싸들고 돌아와 버렸다. 미술 그것에 헌신하는 마음가짐이 아닌 나의 작업은 도리어 순수한 미술을 모독하고 훼손하는 것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테면 동물적 욕구로 순결한 한 여자를 억지로 겁탈하는 행위나 진배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갈수록 나의 생활은 무절제 해지고 삶의 궤도를 점차 잃어가게 되었다. 자신에게 백번을 물어 보아도 모를 일이었다.
"자넨 생계를 위한 그림을 그리든가 아니면 미술을 위한 그림을 그리든가,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를 택하게. 그러다 죽도 밥도 안 된 다니까!"
나의 방탕한 생활을 보다 못해 대학 미술과 선배 한분이 애정 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내던 어느 날, 어차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아예 두 가지 것을 다 팽개쳐 버리기로 작정을 해버렸다.
그것은 우연하게도 엉뚱한 일이 계기가 되었었다. 남들이 들으면 허허 웃어 버릴 황당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이었다. 나는 대낮부터 술에 취해 서울 변두리 거리를 비틀거리며 다니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리어카를 끌고 언덕길을 지그재그 올라가는 짐꾼에게 까닭 없이 시비를 걸고 리어카를 걷어찼던 것이다.
"야, 야! 좀 곱게 다녀. 리어카가 내 길을 막으면 어떡해"
"이런, 지이미! 지금 누가 누구에게 하는 소리냐!"
짐꾼은 참다못해 한두 마디 내뱉으며 목에 둘렀던 땀수건을 팽개치는 것이었다.
"내 살다 보이, 무슨 이런 지슥을 다 보것네. 내가 할 소리를 사둔 네가 해 줘서 핀키는 핀혀다마는 야, 니가 뭣이 간디. 방귀 뀐 놈이 성낸다냐, 이 문디 자슥아!"
"뭐, 문디?"
나는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짜릿한 야성마저 뒤섞인 말씨. 그것은 시골 흙냄새 물씬 풍기는 고향의 말씨였다. 그 사투리가 흥분한 짐꾼의 입에서 마구잡이로 튀어 나오면서 나를 짜릿짜릿하게 자극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어라 말 못할 정겨움에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그렇게 반가웠는지 모른다. 여느 때에는 차라리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던 그 늘어지면서도 투박한 고향 사투리가 왜 그렇게 눈물이 왈칵 솟구치도록 반가웠을까.
그날 나는 그 짐꾼과 함께 밤늦게 술을 마셨다.
"한 밑천 잡으면 고향으로 내려 갈라우, 일을 해 묵고 살아도 울 조상 밑에서 밥 해묵어야 복 받고 살 거 아니겠습니껴."
짐꾼의 그 소박한 철학에 마음이 움직였다고나 할 까. 술에 취해 돌아와서도 나는 늦도록 잠을 뒤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입고, 자는 데 걱정이 없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는지 모른다.
일을 하기 싫으면 부리는 사람을 몇 명 더 써서 편하게 지내면 되겠고, 가고 싶은 데 있으면 가고, 술을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얼마나 자유로우냐 . . .
'배부르고 등허리 따뜻'하니까 '호강에 겨워'하는 생각이었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어디 사는 것인가. 그냥 살아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생활이 한 인간의 삶이어야 하는가.
나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했다. 거대한 자연에 비하면 나약하기 그지없는 아버지. 그 산 꼭대기에 올라 망치를 휘두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새벽하늘에 선하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평생을 시골 농사꾼으로 주어진 삶을 묵묵히 성실하게 살았던 것이다. 비록 가난이 고통과 죽음을 가져왔을지라도 아버지는 적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탓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나의 삶은 텅 빈 강정처럼 형편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비로소 나는 지금까지의 이곳 생활이 하나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헛된 열정에 영혼을 내맡기면서 어두운 방황을 계속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나는 서울 도회지 생활에 한시도 더 몸을 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나는 이튿날 나의 광고 일을 접고 짐을 챙겼다.
< 4 >
"어르신, 이제 그만 시작하시죠."
"그러세!"
김 노인과 나는 쉬고 있던 정자나무 그늘에서 하던 일을 마저 하려 일어섰다. 햇볕은 따가웠지만 하우스 작업이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주민들의 소득 증대를 위해 이곳 짝골마을의 후미진 빈터를 일구어서 수막 하우스 단지를 조성하기로 했다. 음나무와 가죽나무 등을 심어 산림자원을 활용한 녹색관광 활성화 사업도 해보기로 했다.
우리가 삽을 들고 나서자 강 선생이 자진해서 우리들의 뜻에 참여했다. 억새풀이며 자잘한 잡목들이 무성하게 자라 내버려진 산골 땅이지만 우리는 먼저 진입로와 배수로를 열어 산촌마을의 생활환경 개선 작업도 함께 벌이기로 했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농촌지도소에 들렀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초등학교 소꿉 친구 용구와 영호를 만났다.
"야아! 이게 누구야. 오래 간만이다. 뺑코!"
"그래, 범생이, 너 웬 일이냐. 서울에서 잘 나간다고 들었는데!"
"넌, 촉새 아니냐. 잘 있었냐?"
"잘 있고, 말고. 범생이 본지 얼마만이냐, 야!"
그 친구들은 "뺑코", "촉새" 나는 "범생"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내력은 이렇다.
우리가 주로 놀았던 곳은 마을 가운데 정자나무 아래였다. 수령이 600년이나 된 나무였다. 이곳에는 안짝골, 바깥짝골 아이들이 항상 다 모였다. 아무래도 농한기인 겨울방학 때가 최고로 신이 났다. 저학년 때에는 두어 명씩 편을 짜서 납작한 돌을 멀리 세워 넣고 갖가지 방법으로 상대편 돌을 넘어뜨리는 '개치기'를 하는데 이 놀이를 하다보면 온 얼굴에 흙이 하얗게 묻어 얼굴에 꼭 분을 바른 듯했다. 그런데 뺑코는 얼굴은 하얗고 코만 딸기코처럼 빨개서 우리는 그를 늘 "뺑코"라고 불렀다.
사실은 우리 집은 논도 없고 밭도 변변한 게 없어 아무 농사일도 할 수 없는 처지라, 난 책만 봤던 것인데 그걸 모르던 친구들은 그게 모범생으로 보였던지 "모"를 빼고 나를 "범생"이라고 불렀다. 영호네는 이 마을에서는 논이 많은 부자였다. 영호네 논바닥에 괭이로 금을 그어놓고 온 겨울 내내 '가이생' 놀이를 했다. 놀이가 좀 과격해서 여자애들은 '사다리 가이생'을 하고 남자애들은 '오징어 가이생'을 많이 했다. 그 친구는 지네 논바닥이라고 안 끼어드는 데가 없어서 "촉새"라고 놀려댔는데 지금도 그 별명 여전한 모양이다.
고학년이 되면 볏 집 속에 들어가 숨기도 하는 숨바꼭질과 발로 깡통 차기 놀이를 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병뚜껑을 이용하여 '땅따먹기'도 하고 '묵찌빠' 놀이도 했는데 재미가 그만이었다. 이렇게 우리 셋은 이십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서로의 별명을 부르면서 껴안으며 무척 반가워했다. 우리들은 농촌지도소의 은행나무 그늘에 앉아 내가 그동안 서울에서 살아왔던 얘기며, 그리고 고향에 내려와 살기로 작정한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더니 친구들은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오후에는 마을의 초등학교 강 선생이 아이들 이부제 수업에 나가야 되기 때문에 혼자 작업장을 향해 집을 나서려는 참이었는데 촉새가 읍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아니나 다를까 예전의 촉새처럼 또 한마디 톡톡 쏘며 나타난 것이다.
"야아, 범생아! 너 네 집 앞길은 샌님만 다니는 길이냐. 구절양장으로 꼬부라진 길 때문에 원, 다닐 수가 있어야지."
그는 마을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큰 소리로 투덜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게 우리 짝골마을이 자랑하는 유일한 길 아닌가, 촉새!"
"야야, 그건 달 쳐다보고 시나 읇조리던 느그 고조 할배 때 얘기고 이젠 딴 걸 좀 써먹어라. 근데, 너 어딜 가는 참이냐."
"밭에 풀뿌리 털어내려 가는 참이야."
"아니, 벌써 갈아엎었냐?"
"응, 갈면서 엎기도 하지."
"어얼래, 범생이가 웬 일이고. 책밖에 모르는 아아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일도 척척 이네."
"너도 가볼 테냐?"
"아암, 여부 있나."
"빌어먹을! 이렇게 좋은 땅을 썩혀 두고 있었다니. 가랑잎으로 똥이나 싸먹고 살아도 싸다, 싸!."
녀석은 밭에 오자마자 또 거침없이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어기 묵혀 둔 야산에는 뽕나무를 심으면 누에고치를 따도 한 열 트럭은 따겠구먼."
"머리를 쪼끔만 쓰면 되 것 마는."
"머리만 쓴다고 어디 다 되는 일인가?"
나도 친구의 뜻을 알아차리고 어수룩한 대꾸를 했다.
"그럼 가을 중 싸대듯 설치기만 하면 되는 줄 아나? 우리 조상님이 이 바닥에 감자나 갈고 강냉이나 심어 먹고 살았다고 해서 그거나 갈아 부친다면 쌔가 빠지게 일해 봐도 고조 할뱃적 가난이 그대로야."
"뭐 이 척박한 땅에 달리 갈아 먹을 것이 있어야지."
"이 친구야. 사나운 말도 부리기 나름이야. 그런 것만 한탄하고 있다가는 날 샌다고,"
"여기 사람들은 아마 가난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위대한 전통이나 되는 줄 아는 갑네."
"야아! 촉새, 이젠 고만 딱딱거려라."
"짜아식! 듣긴 싫은 게구나."
그는 마을 사람들을 힐끗 돌아보고 나서 나를 향해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하고 싶은 말을 시원스럽게 다 끝냈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부지런히 쇠스랑질을 해나갔다.
저녁때가 되어 읍내로 나가려는 그를 나는 굳이 말려서 붙잡았다.
"아무리 여기가 오지라지만 굶기지는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자고 가지 그래!."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밤을 재촉한다.
< 5 >
노매실 짝골마을이 오랫동안 낙후된 것은 안짝골과 바깥짝골을 이어서 읍내로 빠지는 큰 길 하나 없기 때문이었다. 신작로 내는 일이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야 할 시급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군청에 들러 그 문제를 여러 차례 상의해 보았지만 불과 서넛의 자연 부락을 위해 전장 6킬로가 넘는 방대한 공사를 지방 건설 계획에 넣을 수 없다는 실무진의 말만 들어오던 터였다. 결국 짝골마을의 길은 몇 년이 걸리더라도 이 마을 사람들 전체가 총동원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을걷이가 거의 끝나가는 어느 날 우리는 마을 주민들을 소집하기로 했다. 그날 밤 군데군데 초롱불이 켜진 마을 앞 공터에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들었다.
"자네가 얘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네."
나는 김 노인의 말대로 마을 사람들 앞에 나섰다. 먼저 내가 고향 마을에 온 동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했다.
"마을 주민 여러분! 내 말 좀 들어 보세요! 흔히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엄청난 책임 회피입니다. 내 자신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합시다. 그러나 내 자식, 내 후손까지도 그 가난을 물려주는 것이 왜 죄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밝고 건강하게 커나가야 할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못 먹이고, 못 입히고, 못 가르치는 것은 분명 우리의 잘못입니다. 비록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갈지언정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풍요한 앞날을 열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짝골마을의 이 좁은 길을 보십시오. 돌아가셔서 여러분들의 집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오랜 전에 생겨진 꾸부러진 이 길을 사람들은 그대로 다닙니다. 장마에 길바닥이 지네처럼 토막이 나버려도 괭이질 한번, 삽질 한번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까? 벽이 허물어져 앙상한 횃대가 덩그러니 드러나도 그대로 방치해 둔 집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마을, 내 집, 내 자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잘 사는 남의 마을을 보고 부러워만 하면 뭐합니까? 우리는 그동안 나약한 좌절감과 비굴한 열등감에 휩싸이기만 했습니다. 나도 저렇게 잘 살아야겠다. 우리 마을도 저렇게 잘 사는 마을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우린 잘 살게 됩니다. 두드리지 않는데 문이 저절로 열리진 않습니다. . . . "
나는 일단 하던 말을 잠시 끊고 마을 사람들을 들러보았다. 모두들 하나같이 이제까지 나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모를 그런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서로 귓속말을 하는 가하면 부쩍 의심쩍어 하는 얼굴로 쑤군댔다. 이내 조용했던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고집 세기로 유명한 최 노인이 손을 번쩍 치켜들고 내게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물어 왔다.
"나는 무식해가 도시 먼 말이 먼 말인지 당최 못 알아 먹겠구만은. 자네 이 야그를 가만히 들어 보이 아매도 울 마을에 길을 고쳐야 쓰것다 이 말을 허는 갑인디. 거야 좋은 말이긴 하제. 구라몬 공사도 보통 공사가 아닌디. 이런 큰 공사를 마실 사람들이 비싼 내 밥 퍼묵고 그냥 공짜로 일을 헌다 말이 제이. 아니면 민사무소에서 노임 양곡이라도 몇 되씩 나눠 준다냐. 나는 먼접 그것을 알어사 쓰것다."
"아 - 아니 . . . "
나는 순간 뭐라고 대답할 말을 잃고 아연했다. 곁에 앉아 있던 강 선생이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아시다시피 저는 이곳이 고향이 아니어서 대단히 외람된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지금 현재 여러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주민의 한사람으로서 몇 말씀 드릴까 합니다.
저는 5년 동안 여러분 자제들의 교육을 맡아 오느라 이곳에 살면서 보고 느낀 것입니다만 . . ."
강 선생은 마을 사람들이 짝골의 특수한 지리적 여건을 효과적으로 활용만 한다면 잘 사는 앞날을 기약할 수 있을 거라고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 마을이 오랜 세월을 두고 낙후된 채로 피폐한 생활을 해 왔던 것은 그 근본적 원인이 마을의 좁고 꼬불꼬불한 길에 있었음을 최근의 사례를 들어 잘 얘기하고 있었다.
" . . . 따라서 이 일은 면이나 군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하고 나의 후손을 위한 일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번 일에는 노임으로 양곡 같은 것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말기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메, 베도 묵어사 짜는 것인디 그런 뱁이 어디 있는 겨."
최 노인은 계속 따져 물었다.
"저, 멍청허니 귀묵은 소리 허는 것 좀 보소! 여태까지 했던 얘긴 뭘로 알아듣고 어메가 뭐꼬?"
옆에 있던 최 노인의 친구, 권 노인은 그나마 알아듣는 듯 내 말을 거들었다.
"누가 그딴 걸 몰라서 그러는 겨?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민사무소에서 밀가루 포대라도 얻어 묵음서 하면 어쩌것냐 이것이제."
"민사무소에서 자네 칙간까지 쫓아와서 똥구녁이랑 닦아주락 허소, 그랴."
"아따, 언제는 외할미 콩죽으로 살았던가. 허기 싫으면 좋게 싫다고 나자빠질 일이제. 잔소리는 젠장."
장내는 삽시간에 옥신각신 수라장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왜들 이러십니까? 좀 조용히들 합시다."
보다 못해 김 노인이 일어나 한 마디 했다.
이내 장내는 웅성거리던 목소리들이 사그라지면서 흥분을 감추던 눈들이 시치미를 뚝 떼고 어색하게 눈 둘 바를 모르다가 땅바닥을 향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끼리라도 내일부터 시작하는 게 어떻습니까. 말보다는 행동으로 마을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하니까요."
"아암, 그럼 그렇고말고."
김 노인이 내 손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꼭 쥐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자네가 용기를 잃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튿날 새벽 나는 지게를 짊어지고 마을을 나섰다.
나는 읍내 건재사에 둘러 시멘트 두 포를 샀다. 서투른 지게질이라 지게가 등짝에서 멋대로 놀았으나 이를 악물고 재를 넘었다. 소꿉친구 뺑코, 촉새도 삽이며 망태기를 들고 나를 따라 나섰다. 김 노인도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우리와 합세했다. 밤늦게까지 우리는 마흔두 포의 시멘트를 져 날랐다.
비만 왔다하면 개천 바닥에 놓인 징검다리는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는 통에 마을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강이 되어 버린 개천을 건너다녀야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이곳에 다리를 놓기로 했다.
나는 모래를 퍼 다가 시멘트를 버무리고 뺑코와 촉새는 근처에 있는 바윗덩이를 끌어다 버무린 시멘트로 다리 기둥을 만들었다. 빈 집의 문짝을 뜯어다 다리 틀까지 짰다. 조금 있으려니 이장 양반도 마을 청년 대여섯 명을 데리고 나왔다. 뜻밖에도 그렇게 따져 묻던 최 노인도 나 왔다. 그는 가만히 뒷짐 지고 우리들 일하는 걸 한참을 보더니만 느닷없이 바짓가랑이 걷어 올리더니 내 손에서 삽을 빼앗아 들었다.
"가서 모래나 퍼 날르소, 이건 내가 할 낀 게네."
"일허는 것이 귀역질 나서 못 봐 주겠구먼."
다리 공사는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니 오전 수업을 마친 강 선생은 작업장에 나와 버무린 시멘트를 틀에 붓고 작대기로 다지는 일을 도왔다. 마을의 젊은이들과 아낙네들도 나와 일을 거들었다. 학교를 파한 아이들까지 나왔다.
"마을 사람들이 잠깐씩만 꼼지락거리니 요렇게 다리가 되아뿌리네."
"마실이 참 꽉 째이는 것 같아 보기도 참 좋구만."
단단히 굳으려면 며칠은 더 걸려야 하는 다리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신기한 듯 다리를 디뎌본다. 이렇게 다 만들어진 다리를 바라보고 서 있는 마을 어르신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대견스럽다는 듯이 뿌듯해 하는 것 같았다.
< 6 >
이리하여 노매실 짝골마을에 일찍이 없었던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젊은이, 노인 그리고 남자와 여자와 상관없이 마을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힘센 젊은이들은 짝골 골짜기에 지천으로 흩어져 있는 바윗돌이며 자갈을 짊어 나르고 아낙네들은 소쿠리에 흙을 파서 날라주었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망태기에 잔모래를 담아 날랐다. 노인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모래와 시멘트를 버무렸다.
한쪽에는 새끼줄 자로 줄을 긋는가하면 그 줄을 따라 바윗돌로 견고하게 축을 쌓기 시작했다. 바위 축 틈새에는 버무린 시멘트를 붓고 자갈을 넣어가며 꽁꽁 다져나갔다. 작업은 겨울철에도 눈이 많이 내리거나 아주 추운 며칠을 빼고는 이듬해 봄까지 거의 쉬는 날 없이 강행했다.
삼월 하순 쯤, 신작로 공사는 상당히 진척되어 어느 정도 큰 길의 모양을 갖추어나갔다.
그러나 남은 길이 문제였다. 호랑이 고개를 비롯한 몇 군데의 바윗길과 용암봉에서 노인봉까지의 거친 산길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난공사 지역이었다.
우선 바윗길은 다이너마이트에 의한 발파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고 산봉우리 사이의 길은 불도저 같은 현대식 장비가 아니고는 십 년이 걸려도 완공이 될까 말까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그 길을 그대로 놔 둘 수는 없는 일이어서 우리는 읍내 토건 회사의 실무진에게 소요 공사비가 얼마나 되겠는가를 알아보았더니 절벽 주위로 철책을 두르기까지 한다면 어림 계산으로도 일천만 원에 가까운 공사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짝골마을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액수였다.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 마을 사람들의 뜻은 이제 와서 공사를 중단해 버릴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라면서 마을 기금이라도 모아서 공사는 계속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그 첫 번째 일감으로 수동식 가마니 스무 포대를 샀다. 마침 정부에서 양곡 수매용 가마니를 무제한으로 사들인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다음으로 송아지를 열두 마리를 사서 학교에 맡겼다. 강 선생이 책임을 지고 학생들과 함께 키워내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들에 필요한 자금은 군청의 알선으로 농협에서 융자를 받았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을 세 개 조로 나누어 한 개 조씩 교대하가며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짰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소를 키우는데 열심이었다.
농번기 때에는 모든 작업과 심지어 취사까지 공동으로 하여 시간과 인력을 잘 활용하여 작업을 짜임새 있게 꾸려나갔다.
모자라는 짚단을 사 나르고 가마니를 짜고 짜놓은 가마니를 공판장까지 져 나르는 몇 가지 일이 더 늘어나게 됨에 따라 우리들의 입술은 터져 아물 틈이 없었다.
어언 2년 동안의 씨름 끝에 우리는 예상 공사비의 절반이 넘는 금액을 확보했다. 그것으로 우선 다니기조차 위험한 바윗길부터 내기로 하고 토건 회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찾아간 토건 회사의 실무자는 그간 자재대의 상승으로 공사비는 2년 전보다 배가 넘게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데 한번 알아보시죠. 우리로서는 도저히 적자를 보면서 공사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실무자는 우리들과는 더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듯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가슴 속에서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일손을 놓아버릴 정도로 실의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날 오후 노인봉에서 낙반사고가 일어났다. 다친 사람은 뜻밖에도 김 노인이었다.
노인은 읍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다가 마을 사람들이 길 제방에 축을 쌓는 것을 보고 일을 거들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제방 한 쪽이 무너지면서 바윗덩이 하나가 여지없이 그를 깔아버린 것이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읍내 의원으로 옮겨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바위에 으깨진 한 쪽 다리는 아무래도 절단해야 된다는 의사의 말이었다.
그날 밤 나는 고향으로 돌아 온 후, 처음으로 폭음을 했다. 그리고는 강 선생을 붙들고 울었다.
"이를 어째야 합니까. 어째야 . . . "
" . . . ."
강 선생도 한숨만 내 쉴 뿐 말이 없었다.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만나는 사람마다 마을 사람들도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후 세 시 때가 조금 지나서였는데 웬 헬리콥터 한 대가 우리 마을 상공을 서너 바퀴 빙빙 돌더니 마을 앞 빈터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굉장히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귀를 막아야 할 정도였지만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헬리콥터를 구경하려고 우르르 몰려 나갔다. 나도 웬 일인가 싶어 사립문을 나서는데 마을 이장을 앞세우고 재건복 차림의 웬 중년 남자 서넛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 사람입니다요."
하고 이장이 그 중 가장 젊고 소탈해 보이는 남자에게 나를 소개했다.
"저기 도지사 녕감님이 이리로 오셔."
이장은 약간 겁먹은 소리로 내게 귀띔을 했다.
"도 재철입니다."
나는 얼떨떨해서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수고가 많습니다. 도 선생."
지사는 내 손을 덥석 쥐면서 말했다.
"도 선생과 이 마을에 대해서는 한 달 전부터 소상한 보고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아주 장한 일을 하였더군요."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도지사 말대로 내가 장한 일을 했다면 불러서 치하해도 좋을 것을 굳이 헬리콥터로 여기 오지까지 찾아 온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린 자신들을 위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우리 스스로가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분한 칭찬을 받을 일이 못됩니다만."
"그게 장한 일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우리 사회에는 자기 힘으로 능히 해낼 수 있는 일도 행정기관에서 해 주겠지 하는 의타심에 젖어 방치해 두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번에 서로 도와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려는 협동정신이 강한 마을을 선정하여 중점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방침을 세웠습니다.
노매실 짝골이 나무랄 데 없는 모범 마을로 선정된 것입니다. 마침 이번에 정부에서 친환경 유지작물(油脂作物) 재배단지를 조성하여 농가소득을 올리는 농림 정책을 펴기로 하였는데 이곳이 적지일 것 같다는 의견이 있어 농수산부의 전문가와 함께 현지답사를 겸해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요!"
"세세한 것은 좀 더 검토한 후에 결정할 일입니다만 내가 보아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유지작물 단지를 만들어도 되겠다고 생각하오! 그렇게 되면 이곳에 유지공장을 함께 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겠소."
그리고 지사는 힘껏 도와주겠으니 구상하고 있는 일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예전에 그려 두었던 우리 마을의 신작로 그림을 들고 나왔다.
"참, 도 선생은 미술을 전공 하였다던가 . . . "
지사는 그림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나를 쳐다보았다.
" . . . 화폭 위에 붓과 물감으로 그리던 그림을 이제는 고향 땅 위에 팔다리와 땀으로 그림을 그려 보시오. 미완성된 부분에 대해서는 마저 그릴 수 있도록 우리가 지원을 해주겠소."
나는 열려진 입이 닫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버지 때부터 내게 이어진 내 가슴 속에 뭉쳐있던 소망이 마침내 세차게 폭발하여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지사가 돌아간 며칠 후 군청에서 현지 조사반이 마을에 출장을 나왔다. 그들은 하룻밤을 묵어가면서 유지작물 재배단지를 만드는데 필요한 갖가지 토양 조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실의에 빠졌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갑자기 생기가 넘쳤다.
그간 중단 되었던 신작로 공사도 다시 시작되었다. 군에서 모자라는 공사비를 충당해 주고 불도저 한 대와 착암기, 시멘트 등을 보내 주었다.
불도저는 엄청난 힘으로 흙을 깎아 밀어 붙이고 착암기는 요란하게 몸을 흔들며 바위틈에 구멍을 냈다. 마을 사람들의 구릿빛 얼굴에는 밝고 건강한 미소가 샘물처럼 넘쳐나고 있었다.
공사의 진척은 의외로 빨라 두 달 만에 호랑이 고개 주위만 남겨놓고 거의 완공이 되었다.
호랑이 고개의 발파 작업을 하는 날 아침 나는 읍내 병원으로 김 노인을 찾아갔다.
잘려진 다리만 아니라면 그는 건강한 사람으로 완쾌되어 있었다.
내가 오늘 마지막으로 호랑이 고개의 발파 작업을 한다고 하자 김 노인은 갑자기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꼭 가봐야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여서 의사에게 물었더니 택시로 조심히 갔다 오라면서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주었다.
택시가 오자 김 노인은 목발을 집어 들었다.
나는 말없이 그를 부축하며 택시에 태웠다. 면사무소 앞에 이르자 기사가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노매실 안짝골까지 갑니다."
"근데 저긴 말입니다요."
택시 기사는 우리를 외지에서 온 손님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저긴 리어카도 못 들어갑니다요."
"이 양반 소식이 깡통이야."
"아! 소문만 들었는데 벌써 길이 뚫렸나요?"
택시가 삼거리에 이르자 짝골가는 좁은 길은 실뱀처럼 꾸불꾸불한 옛날의 샛길이 아니었다. 제법 확 트인 큰 길이 되었다.
택시가 막 짝골 입구에 접어든 때였다. 갑자기 달리고 있던 택시까지 덜컹거리게 하는 폭음이 울렸다. 기사가 엉겁결에 브레이크를 밝는 순간 나는 택시 문을 열고 호랑이 바위 쪽을 쳐다보았다. 고개 너머로 뽀얀 연기 같은 것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꽝 꽈르르르 . . . "
땅바닥을 흔들어대는 굉장한 폭음이었다.
"꽈르르르 -"
"꽈르르르 -"
한 번 터진 폭음은 거대한 동물이 마지막 숨을 거두며 토하는 비명처럼 처절한 여음으로 인근 산골짜기에 오래도록 메아리를 부르고 있었다.
"어르신. 저 소리 들으셨죠?"
"아암 듣고말고."
김 노인은 눈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서리 내린 눈썹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서 가세."
"네."
택시는 다시 출발했다.
나는 우쭐대고 싶도록 들뜬 마음으로 훤하게 탁 트인 짝골 길을 택시 창틈으로 바라보았다. 이 길을 먼지 날리며 휭하니 달리는 트럭하며, 푸르게 우거진 유지작물 재배 농공 단지 . . .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일 듯 선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니라 내일부터라도 당장 하나, 하나 현실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들이었다.
이목구비가 마치 호랑이 형상처럼 툭 튀어 나온 호랑이 바위는 이제 더 이상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바위는 산산이 깨어지고 부서져서 길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너도 나도 몰려들어 바윗돌을 치우고 있었다.
우리는 고갯마루에 택시를 세웠다. 김 노인은 서투르게 목발을 짚으며 차에서 내려서서,
한참 동안 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보게 젊은이! 다리 하나를 잃고 나니까 확실히 불편하긴 하네만 . . ."
"그 대신 난 자랑거리 하나를 얻은 셈이네. 죽어서 내 조상님을 뵙게 되면 난 훈장처럼 이 다리를 자랑할 걸세."
나는 콧마루가 찡하게 울리는 것을 느끼면서 노인을 부축하고 언덕길을 내려갔다.
마을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마을 이장이 이 뜻 깊은 날에 만세 삼창을 부르자고 제의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목청이 터지라고 만세를 불렀다.
"우리 마을을 위하여,"
"만세!"
"만세!"
"만세!"
짝골마을을 온통 뒤흔드는 만세 소리가 인근 산봉우리에 부딪치면서 메아리 되어 멀리 퍼져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우르르 언덕길 아래로 몰려왔다.
김 노인은 그들을 모두 껴안기라도 할 것처럼 두 팔을 치켜들었다.
마을 사람들의 밝고 건강한 웃음이 함박꽃처럼 활짝 피어올랐다.
나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고 있었다. 김 노인도 감격에 겨워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애써 감추며 곁에 서있는 나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자, 저기 뻥 뚫린 길을 보게나, 젊은이!"
"이젠 잘 사는 것만 남았네. 우리 고향도 잘 사는 마을이 될 것이네."
"어르신, 그럼요!"
짝골마을의 양지바른 곳에 누워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이제야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나를 감싸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노매실"마을은 필자의 고향마을로서「경북 군위군 효령면」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 다. 너무나 가난한 산골 오지마을로 새마을 사업조차 불가능할 정도여서 1976년 낙후 마을로 지정되었으나, 마을주민이 단합하여 "친환경 청정 유지작물 재배"사업을 성 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전국에서 드물게 살기 좋은 농촌 모범 마을을 이룩하였다.
현재는 4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 산촌마을이지만 필자는 이들 고향마을 주민의 아 름답고 소박한 마음과 애향의 노고를 깊이 기리기 위해 필자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약간의 상상을 덧대어 이 논픽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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