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당 앞에 있는 두 개의 돌 물통은 / 二樂堂前雙石盆(이요당전쌍석분)
그 언젠가 고운 여인 머리 감던 것이런가 / 何年玉女洗頭盆(하년옥녀세두분)
그 여인은 가고 없고 연꽃만 곱게 피어 / 洗頭人去蓮花發(세두인거연화발)
부질없이 남은 향기 옛 물통에 가득하네 / 空有餘香滿舊盆(공유여향만구분)
경주박물관 뒤쪽 뜰에는 길이가 4m에 육박하는 실로 거대한 돌물통(석조·石槽) 하나가 놓여 있다. 이 돌물통은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박물관 자체가 잡혀 온 유물들의 포로수용소인데, 이 돌물통인들 어찌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겠는가. 이차돈이 순교를 했던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가 바로 그의 고향이다.
워낙 거대하다 보니 이 돌물통에는 그 역사를 증언해주는 여러 가지 글들이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648년 유둣날, 그러니까 여인들이 창포 삶은 물에 치렁치렁 머리를 감는 날에 이교방(李敎方)이 지어서 새긴 위의 한시다. 시인은 이 거대한 물통 앞에서 먼저 그 용도를 상상하고 있다. 아마도 이 물통은 언젠가 옥과도 같은 여인이 치렁치렁 머리를 감는데 사용했을 거야. 하지만 그 여인은 이제 사라져버렸고, 물통 속에는 연꽃만 환하게 피어나서 '부질없는' 향기를 풍기고 있다. 바로 이 '부질없다'는 표현 속에 상상 속의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은근슬쩍 포착되어 있다. 여인도 없는데, 여인의 향기와도 같은 향기만 풍기면 뭐 하노, 그자.
이 돌물통은 조선 전기 김시습이 폐허가 된 흥륜사로 찾아갔을 때, 그 폐허 속에 나뒹굴고 있었다. 1638년 경주부윤 이필영이 경주 관아의 이요당 앞에다 옮겨놓은 뒤에, 연꽃을 심어놓고 구경하였다. 부처님을 모시던 이 물통에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의 한 대목인 '천광운영'(天光雲影·하늘빛 구름 그림자)이란 네 글자가 아름드리로 새겨진 것도 아마 무렵의 일이었을 게다. 이 돌물통은 일제 강점기에 이요당 바로 옆에 경주박물관이 생기게 되자 박물관으로 이사를 했고, 박물관을 새로 지어 이사를 하자 새 박물관 뒤뜰로 다시 끌려갔다.
어디 그뿐이랴. 연꽃을 피워도 부처님을 위해 연꽃을 피워야 할 돌물통이 관아에 끌려가서 선비들을 위해 연꽃을 피워야 했고, 시를 새겨도 부처님을 찬양하는 시를 새겨야 마당할 텐데, 주자의 시와 상상 속의 이성을 그리워하는 야릇한 시를 몸에다 새겨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꿈에서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서울시장의 참으로 느닷없고 어처구니없는 자가당착의 죽음처럼, 단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구나, 돌물통의 기구한 운명이여!

시조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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