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폭 빠져서 보는 TV 드라마가 하나 있다.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라는 드라마다. 앞에 괄호를 친 것은 드라마 홈페이지에 그렇게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제작진의 의도를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제목은 두 가지 의미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서로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 가족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묶여 있다"는 부정적 뉘앙스다.
다른 하나는 "서로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다"는 의미의 긍정적 뉘앙스다. 제작진의 의도는 이 가운데 뒤쪽에 가까운 듯하다. 가족이면서도 서로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극 중 인물들의 고백과 성찰이 따뜻한 시선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부부와 두 딸 그리고 막내인 아들, 이렇게 다섯 식구로 이루어진 가족의 이야기가 줄거리다. 초반부터 아내의 졸혼 선언으로 부부간의 갈등을 드러내며 시작했지만 남편의 갑작스러운 사고를 계기로 가족은 서로에 대해 몰랐던 부분들을 조금씩 알아간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동안 가족이니까 서로 너무나 잘 안다고 여겼던 습관화된 믿음들이 하나씩 깨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파국으로 흐르지 않고 '기꺼이'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새롭게 보수해 나간다. 아직 끝나지 않아서 뭐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는 대략 그렇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면서 정작 든 생각은 '가족'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안다는 일의 어려움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대끼며 산 가족조차 저럴 수 있는데 매일 만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얼마나 아는 걸까? 아니 제대로 알기는 하는 걸까? 더 나아가 도대체 어떤 관계라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었다. 1993년에 개봉했는데, 플라이낚시를 중심적인 소재로 삼아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와 두 아들의 성장 과정을 한 폭의 수채화를 보듯 담백하게 스케치한 영화다. 영화에서 큰아들은 반듯하게 자라 대학교수가 되지만 둘째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 젊은 나이에 비운에 죽는다. 그렇게 살다 간 둘째를 가슴에 묻고 살던 아버지는, 노년에 자신의 교회에서 행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통해 그 둘째의 삶과 화해한다.-"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도 완벽하게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누군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더라도 그를 완전하게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누구를 완전하게 사랑하지도 않고 그를 완벽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말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완전하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또 무엇이 필요할까? 한층 원숙해진 자신의 낚시 솜씨를 칭찬하는 아버지의 격려에 해맑은 웃음으로 대답하던 영화 속 둘째 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훌륭한 낚시꾼이 되었다는 아버지의 칭찬에 그는 '물고기처럼' 생각하려면 아직 3년은 더 걸려야 할 거라며 웃는다.
물고기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물고기'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자기 세계에 머물러 있는 한 물고기처럼 생각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를 '이해'가 아니라, 영화 속 대사처럼 '사랑'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이럴 때 우리는 이해하려는 것을 그만두고 있었던 그대로를 받아들임으로써 죽은 아들의 삶과 화해했던 영화 속 아버지처럼 다른 이와 완전한 소통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이해는 언제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남기지만, 제대로 된 사랑은 그것까지도 받아들이는 행위인 까닭이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드라마를 만나 '본방 사수'를 하면서 뜬금없이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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