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속 실크로드] <2> 신라인은 융합과 창조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입력 2020-08-30 20:17:50 수정 2020-08-31 17:43:20

매일신문 창간 74주년 기념 계명대학교 실크로드중앙아시아연구원, 경상북도 공동기획

서봉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시간을 기원전 3세기에 맞춰놓고,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 서북지역에 걸쳐 있던 고조선에서 출발해보자. 거기에서 서북쪽으로 향하면 흉노를 만난다. 다시 서남쪽으로 돌아 지금의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땅이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흉노는 중국 한(漢)나라와 팽팽한 긴장 관계를 이어갔고, 나중에는 한반도까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신라인들은 오랜 세월 광활한 유목세계를 풍미했던 흉노족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갔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에서는 신라인들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 땅은 겨우 한나라와 고조선의 관계만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 황금보검.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서봉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스키타이의 황금문명이 한반도까지

신라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황금 문화이다. 신라 땅에서 출토된 금관, 황금보검, 유리구슬, 그리고 로만글라스 등은 주로 서역이나 로마에서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언제 어떻게 들여온 것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특히 금관은 전 세계에서 지금까지 모두 14개가 출토된 가운데 10개가 한반도에서 발굴됐고, 6개가 신라 것이다.

신라 금관들은 대략 5~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 몇 세기 이전에 제작되어 사르마트나 아프카니스탄 등 북방 중앙아시아에서 출토된 금관들이 그 원형인 셈이다. 훈족의 아틸라 제국(434-454) 시기에 크게 유행했던 채색 기법에 금 알갱이를 빽빽이 눌러 박은 누금(鏤金) 장식 기법의 황금보검도 카자흐스탄 보로보에(Borovoe)에서 발견된 황금보검 장식 기법과 거의 일치한다.

돌무지덧널무덤 구조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 황금보검.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멀리 서역과 동유럽에 분포하던 이런 유형의 황금 보물들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한반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실마리는 바로 스키토-흉노 문명 벨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의 형식을 갖춘 스키타이의 대형 무덤 쿠르간과 관계가 있다.

쿠르간은 기원전 4000년 무렵 시작돼 유라시아 북부 초원지대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무덤 양식이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市) 동쪽에 있는 이시크(Issyk) 쿠르간이 대표적이다. 축조 연대가 기원전 5세기로 추정되는 이 쿠르간에서는 황금 조각을 몸에 두른 2.15m 키의 미라가 발견됐다. '황금인간'이라 불리는 이 미라의 의복을 장식한 금제 문양은 투바의 아르잔(Arzhan) 쿠르간을 비롯해 알타이의 쿠르간 등에서 출토된 일련의 금제 문양과 유사하다.

아르잔에는 동서로 20㎞나 펼쳐진 긴 협곡에 180기가 넘는 대형 무덤이 군집돼 있다. 바이칼 호수 서편 초원지대 주민들은 대부분 투르크족이고, 문화적으로는 몽골과 비슷하다. 고음과 저음을 동시에 내는 특이한 발성법의 노래 '후미'(Khoomei)도 이곳에서 시작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이곳에는 온다르(Ondar)란 성을 지닌 사람이 많아 연세대 지배선 명예교수는 고구려 평강공주의 남편인 온달이 이 지역 출신이라는 흥미로운 주장도 내놓은 바 있다.

4~6세기 무렵 경주 평야를 무대로 발전한 신라의 대형 돌무지덧널무덤도 실크로드에서 보면 유라시아 동쪽 끝에 있는 또 하나의 쿠르간이다. 구조와 매장법, 부장품 등 여러 측면에서 유라시아의 기마문화, 황금문화에 맥이 닿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 대릉원 항공사진. 경주시 제공
돌무지덧널무덤 구조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기원전 3세기까지 초원에서 살았던 유목민족 스키타이의 황금 문명이 유라시아 대륙을 넘어 한반도에 도달하기까지는 흉노가 그 매개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알타이지역과 몽골을 거쳐 중국 황하 중류의 오르도스지역을 통로로 삼았을 것이다. 따라서 쿠르간은 흑해와 코카서스지역만 아니라 알타이와 남부 시베리아지역과 한반도까지 연결시켜주는 문명의 코드인 셈이다.

인물 뒤편에 동복이 실려있는 기마인물형 토기(국보 제91호).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경주 대릉원 항공사진. 경주시 제공

◆황금과 쿠르간, 그리고 마립간

경주 대릉원의 밀집된 무덤들은 흉노계 지배층 공동묘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흉노는 기원후 1세기 말에 쇠퇴했다가 이후 다시 왕성했지만 기원후 350년경 한나라에 대파당하며 다시 동서로 분산됐다.

이때 서진한 흉노가 훈족이 됐다면 동진한 흉노는 신라로 남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유럽으로 진출한 훈족과도 꾸준히 교류를 했을 것이고, 위진남북조 시대(439-559)의 혼란 속에서 신라로 향한 여정은 더욱 활발해졌을 것이다. 몽골의 노용 울(Noin Ula) 등 아시아 지역에서 카탈루냐 평원에 이르기까지 훈족의 이동경로에서만 발견되던 청동솥 동복(cauldron)이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터키 고르디온의 쿠르간. 미다스 왕의 무덤으로 알려졌다. 계명대 실크로드중앙아시아연구원 제공
인물 뒤편에 동복이 실려있는 기마인물형 토기(국보 제91호).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라 왕의 칭호가 이사금(呢師今)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뀐 것도 바로 이때다. 유리왕(3대)과 탈해왕(4대)이 서로 떡을 깨물어 치아 자국이 많은 순서로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으로 미뤄 그때까지 이사금은 단순한 연장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물왕(재위 356-402)이 등장한 뒤 지증왕(재위 500-514)에 이르기까지 6명의 왕들은 마립간으로 불렸다. '마립간'의 '간'은 북방 유목민의 단어로서 '최고의 칸'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절대 권력을 가진 통치자가 등장했음을 말한다.

금관이 등장한 것도 바로 왕의 칭호가 바뀌던 내물왕 이후였다. 황금과 쿠르간은 새롭게 권력을 쥔 김(金)씨들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표방하고 초월적 지위를 과시하는 훌륭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금관을 비롯한 신라의 황금 유물은 4세기 말에 갑자기 출현했다가 150여 년이 경과한 6세기 초반에 홀연히 사라진다. 흉노로부터 유입된 황금은 소진됐을 것이고, 마립간 시대가 종식되면서 무덤 양상도 완전히 달라진다. 내부 구조도 바뀌고 황금 유물 부장품도 사라지고, 북방 유목민의 세계관도 사라진다.

제23대 법흥왕(재 514~540)의 무덤이 그 이전 왕릉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대릉원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산기슭에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율령과 불교 등 종교적 장치로서 왕의 권위를 부각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김중순 교수(계명대학교 실크로드중앙아시아연구원장)는 "황금과 쿠르간으로 대표되는 신라의 우수한 문화는 흉노 이주민의 뛰어난 기술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고유한 자질과 융합시켜낸 결과"라고 설명했다. 신라인들은 자신의 역사를 결코 한반도라는 영토와 한민족이라는 민족의 범위 안에 가둬둔 적이 없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개척자의 DNA에 숨겨진 창조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경주 황남대총.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터키 고르디온의 쿠르간. 미다스 왕의 무덤으로 알려졌다. 계명대 실크로드중앙아시아연구원 제공

터키 앙카라 인근 고르디온(Gordion)에 신라 왕릉을 연상케 하는 대형 쿠르간이 있다. 기원전 8세기경 프리기아(Phrygia) 왕국을 다스린 미다스 왕의 무덤이다. '미다스의 손(Midas touch)'으로 알려진 신화 속 주인공은 디오니소스로부터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선물이라기보다 무심코 안았던 공주마저 황금 조각으로 바꿔버린 저주였다. 그는 결국 팍토루스(Pactolus) 강에 몸을 씻고 나서야 신탁에서 해방된다. ​팍도루스 강은 인류 최초로 금화를 주조했던 곳이고, 지금도 사금 산지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미다스의 손'은 이웃 스키타이 황금문명에 대한 강력한 선망에서 나온 이야기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미다스 왕은 목양의 신 '판'(Pan)의 추종자가 됐다. 판이 음악의 신 아폴론과 피리 연주 대결을 벌였을 때 그는 어리석게도 판의 편을 들었다. 화가 난 아폴론은 미다스에게 응징을 내려 두 귀를 당나귀 귀로 바꿔버렸다.

그는 터번을 쓰고 귀를 가렸지만 이발사에게까지 ​비밀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를 견딜 수 없었던 이발사는 들판에 구멍을 파 비밀을 폭로하고는 그 구멍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그 자리에 갈대가 자라면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속삭임이 들판 전체로 ​퍼져나갔다.

경주 황남대총.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그런데 비슷한 일이 신라에서도 벌어졌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문왕(재위 861∼875)은 임금이 된 뒤 갑자기 귀가 길어져서 당나귀처럼 되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으나 오직 왕의 머리를 만지던 복두장(幞頭匠·두건을 만드는 장인)은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 그 사실을 감히 발설하지 못하다가 죽을 때에 이르러 도림사라는 절의 대밭 속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나귀 귀!"라고 소리쳤다. 그 후로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다. 왕은 대나무를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었으나 그 소리는 여전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신화학에서 아르네-톰슨의 분류 방식에 따라 정리됐을 만큼 보편적인 설화 모티프이다. 유라시아권에서는 인도·몽골·터키·투르크스탄·키르키스탄·칼미크·투바 등을 거쳐 스키타이와 흉노의 동선을 따라 신라까지 이어진다. 지중해에서 거의 1500년 넘어 신라 땅에 도착한 셈이다. 신라가 쿠르간을 통해 스키타이 문명을 공유한다는 고고학적 주장이 이처럼 설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우리 역사의 지평을 민족을 넘어 세계를 향하도록 해야 하는 이유이다.

◆목차

〈1〉 신라인은 코즈모폴리턴이었다

〈2〉 신라인은 융합과 창조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3〉 코드명 왕오천축국전…교류의 가치

〈4〉 신라인은 세계화의 주역

〈5〉 신라인이 남긴 미래의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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