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볼턴 회고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입력 2020-06-28 14:39:57 수정 2020-06-28 23:05:28

노동일 경희대 교수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이 출간 첫날인 지난 23일 뉴욕 맨해튼에 있는 대형 서점체인 반스앤노블에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노동일 경희대 교수
노동일 경희대 교수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이 태평양을 사이에 둔 한미 양국을 흔들고 있다. '그 일이 일어난 방'이라는 제목처럼 볼턴의 책은 당대에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운 백악관 내부 모습을 폭로하고 있다. 미국 정가는 볼턴의 책이 오는 11월 대선에 미칠 영향력에 관심을 쏟는 듯하다. 우리는 볼턴이 밝힌 북핵 협상 관련 기록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김여정의 언어 폭탄에 이은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군사적 도발 예고, 김정은의 군사 행동 보류 지시 등으로 모두 예민해진 시점에 회고록이 공개되어서일까. 볼턴의 책은 본토에서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관심 대상이 된 것 같다. 청와대와 전·현직 참모들도 말을 보태고, 정치권과 언론도 한마디씩 거든다.

이른바 진보 진영은 볼턴이 일본과 함께 "한반도 통일의 역사적 전환이 될 천재일우의 기회"를 방해한 존재라고 본다. "존 볼턴 스스로 누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눈물겹게 애쓰는지 말하고 있다." 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의 말이다. 반면 소위 보수 진영에 볼턴은 구세주다. 트럼프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한 채 영변 핵시설 파괴와 제재 해제를 교환할 수도 있었던 재앙적 선택을 볼턴이 막았다는 것이다.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분식평화, 남북 위장평화 쇼와 관련된 여러 의문에 대해" 국정조사라도 하겠다고 한다. 언론의 시각도 진영에 따라 극단으로 나뉜다. 아쉬운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정치권과 언론은 늘 외교안보 문제에 대한 초당적 대처를 주문한다. 하지만 실제는 대개 구두선에 그치고 만다. 이번 사안 역시 마찬가지다. 한반도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외교 비사가 공개된 마당에 '토착분단세력' '대국민사기극'으로 상대 진영 비난과 험담만 주고받을 뿐 진지한 성찰과 대안 모색에는 관심이 없다.

국제 정세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식견과 경험 부족, 참모들의 분열이 초래한 백악관의 외교적 난맥상은 사실 새롭지 않다. 볼턴 회고록은 그에 관한 자세한 실상을 밝힌 것뿐이라는 게 6월 25일 자 미국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의 평가이다. 포린 폴리시의 분석은 우리 청와대와 진보 진영의 평가와는 결이 많이 다르다. 볼턴은 이란 문제와 관련, 미국 국익보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익을 앞세운 인물이다. 볼턴은 트럼프가 이란과의 협상 결정을 내리면 즉시 그만두려고 두 줄짜리 사직서를 준비했다고 한다. 반면 북한과의 협상은 큰 불만이 없었다. 볼턴은 김정은의 북한에 대해 '용인할 수 있었다'(can stomach)고 한다. 사실이라면 북핵 협상 실패는 볼턴의 방해보다 '완전한 핵 폐기'라는 미국의 원칙에 북한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 포함해 볼턴 회고록은 다방면에서 우리에게 큰 과제를 안겼다. 볼턴이 새로운 비밀을 폭로하진 않았어도 미국 외교의 깊숙하고 내밀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외교문서 해제 시에나 알 수 있는 일들을 시차를 두고 중계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자신의 관점에서 본 사실관계이기 때문에 의도치 않은 왜곡이 있을 수 있다. 이를 놓고 보수·진보가 진영에 따라 아전인수만 해서는 우리가 얻을 게 없다. 이념을 떠나 모든 전문가들을 모아 상황과 맥락을 덧붙이며 볼턴 회고록을 분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실패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미래의 지침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북핵 해법은 미국에만 맡길 수도 없고, 볼턴만 없으면 만사형통일 수도 없다. 한반도 평화가 우선인 대한민국. 체제 생존이 당면 과제인 북한. 국민과 언론에 비치는 모습이 가장 큰 관심사인 미국 지도자. 그 사이에서 비핵화와 제재 해제를 놓고 벌이는 협상이 수월할 리 만무하다. 트럼프가 재선이 되든,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든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피지기라고 백전백승할 수는 없지만 지피지기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최근 북한 도발에 직면하여 민주당과 통합당은 외교안보 연석회의를 가진 바 있다. 다시 한번, 아니 여러 번 정치권이 전문가들과 함께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 볼턴 회고록을 놓고 지피지기를 위한 분석과 대안 모색이 있어야 한다. 북한 핵 문제는 보수·진보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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