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뿌리 위에 앉아 책을 읽으니 / 讀書松根上(독서송근상)
책 가운데 솔방울이 툭, 떨어지네 / 卷中松子落(권중송자락)
지팡이에 의지해 돌아가려니 / 支笻欲歸去(지공욕귀거)
산허리에 구름 기운 희기도 하네 / 半嶺雲氣白(반령운기백)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주변에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그야말로 겹겹이 포진하고 있었다. 조선후기의 사가시인(四家詩人)으로 불리고 있는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강산(薑山) 이서구(李書九) 등이 그 대표적인 면면이다.
그 가운데 앞의 세 사람은 서자 출신으로서 신분적인 비애를 태생적으로 안고 있었지만, 이서구는 당당한 양반가의 아들이었다. 걸핏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던 벼슬살이를 꽤 오랫동안 했으면서도 이렇다 할 큰 풍파를 만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은둔에다 마음을 두고 있었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벼슬살이를 한 것에 대해 몹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당연한 결과로서 강산의 한시에는 자연의 품속에 노닐면서 드높은 아취와 아득한 격조를 구축한 작품들이 적지 않은데, 위의 작품도 바로 그런 경우다.
"저물녘 흰 구름 일어나는 시내(백운계·白雲溪)로부터 '다시' 서쪽 산등성이(서강·西崗) 어귀로 가서 소나무 그늘 아래 잠시 누웠다가 이 시를 지었다(晩自白雲溪 復至西崗口 少臥松陰下作)". 이것이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인데, 그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 기나긴 제목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다시'라는 시어가 아닐까 싶다. '다시'라는 말에 비추어보면 화자는 먼저 서쪽 산등성이 어귀로 가서 소나무 그늘 아래 좀 놀다가, 흰 구름이 일어나는 시냇가로 시나브로 발걸음을 옮겨 흰 구름과도 좀 놀고 나서, 서쪽 산등성이 어귀로 '다시' 돌아가 소나무 그늘 아래 잠시 누웠다가 드디어 이 시를 지었을 게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은 제목 그 자체만으로도 멋진 시가 아닐 수 없다. 자연 속에서 그윽하게 노니는 작중 화자의 운치 있는 자태가 눈앞에 훤하게 그려지지 않는가.
제목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작품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보다시피 화자는 소나무 밑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읽고 있는 책 속에 솔방울이 툭, 하고 떨어진다. 난데없는 솔방울의 낙하로 책 읽기의 흥취도 깨어졌으니, 날도 저무는데 이제 그만 읽고 돌아가야겠다. 지팡이를 짚고 문득 쳐다보니, 산허리의 흰 구름이 참 그윽하다. 이럴 때 시 한 수가 없을 수 없어서 지은 것이 바로 위의 작품인데, 그 속에 그림이 여러 폭이다. 그 그림 속으로 슬며시 들어가서 시인의 뒤를 이리저리 졸졸 따라다니며 좀 놀고 싶은 여름인데, 아아!

이종문 시조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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