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칼럼] 평화 타령만 하다 북 비핵화 물 건너갔다

입력 2020-06-22 06:30:00

19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훼손된 개성공단지원센터가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훼손된 개성공단지원센터가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정창룡 논설주간
정창룡 논설주간

우리 '국방백서'가 북한을 '주적'(主敵)이라 명기했던 적이 있었다. '1994 국방백서'다. 이전 우리 정부의 어떤 공식 문서에도 이 표현은 없었다. 1972년 말 정부가 국방목표를 설정할 때도 '주적'은커녕 '적'이란 말도 쓰지 않았다. 1988년 국방백서를 처음 발간하면서 국방목표를 "적의 무력 침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한다"고 규정한 것이 고작이었다. 북한을 직접 거론하지도 않았다. 그렇던 북한이 국방백서에 '주적'이 된 것은 오롯이 '핵'과 '막말' 때문이었다.

1993년 한반도는 이미 북핵 문제로 시끄러웠다. 북은 돌연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하더니 이듬해엔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박차고 나갔다. 핵무기 개발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북한의 핵 개발 프로젝트 저지를 위해 한·미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남·북은 판문점에서 8차례 실무접촉을 가졌다. 이때 북측 대표였던 박영수 입에서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왔다.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며 "전쟁이 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 막말이 공개되며 국민감정을 뒤집어 놓았다. 북핵에 대한 우려와 '서울 불바다'에 대한 공포가 어우러져 북한은 공식적인 우리의 '주적'이 됐다.

이후 26년이 흘렀다. 그동안 북은 변하지 않았다. 한 번도 핵 개발 의지를 꺾은 적이 없다. 벼랑 끝 전술로 몇 번 실리를 챙기고, 때론 평화를 위장하며 시간을 벌더니 급기야 2018년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이제는 "비핵화라는 개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포기하려면 왜 (핵무기를) 만들었겠는가"라는 말이 선언 끄트머리에 '한반도 비핵화'를 집어넣은 판문점선언이 몽상이었음을 웅변한다.

북의 위장 전술에 놀아나 북핵을 고착화한 잘못은 우리 정부에 있다. 이는 국방백서 변화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북은 우리 정권 성향에 따라 '주적'이 되기도, '위협'이 되기도 했다. 다시 '적'으로 돌아가더니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됐다. 참여정부는 2004 국방백서에서 주적을 빼고 '위협'이란 말로 대체했다. 그러다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이 터지자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으로 부활했다. 이 또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2018 국방백서에서는 사라졌다. 북은 일관됐고 백서는 정권 입맛에 따라 갈팡질팡했다. 하기야 남북 정상이 얼싸안고 포옹을 하는 마당에 북을 적이라 칭하는 것은 마뜩잖을 수 있다. 한반도 비핵화라고 쓰고선 북 비핵화가 실현된 듯 포장한 것도 그랬다. 그렇게 위장된 평화공세에 놀아난 정부가 오판의 대가를 혹독히 치르고 있다.

매일희평.김경수화백
매일희평.김경수화백

뒷마당에 핵폭탄을 잔뜩 쟁여 둔 북은 이제 해묵은 벼랑 끝 전술을 동원해 경제까지 챙기려 든다. 뒷배가 든든하니 언사는 거칠다. 우리를 '적'으로 간주하겠다면서 온갖 막말을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 옥류관 주방장까지 나서 "국수 처먹을 때는 요사를 떨더니"라며 대한민국 대통령을 모욕한다. 우리 군을 향해서는 "찍소리 말고 제 소굴에 박혀 있지 않으면 큰 경을 치를 것"이라고 위협한다.

그래도 정부는 대북 전단을 살포하는 우리 국민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여전히 북과의 '대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북이 싫어하는 비핵화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는다. 온갖 막말을 들으면서도 이렇다 할 대책도 없는 정부를 보며 국민들은 모욕감에 치를 떤다.

"확전을 억제하려면 적보다 나은 의지와 용기,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20세기 최고의 미래학자로 꼽히는 허만 칸이 던진 명제다. 그 명제가 새삼 그리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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