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기억속의 아버지(이호택)는 늘 근엄하고 부지런함을 몸소 실천하는 분이셨다.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나오시고 유학을 하는 중에 몸에 밴 듯했다. 나아가 어머니마저 아버지가 철칙으로 내세우는 '절약만이 살 길이다.'라는 철학 앞에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고 계셨다.
돈에 관해서 지독하게 집착을 보인 만큼 농사일에도 타의추종을 부러워할 만큼 열정적이셨다. 일 년 중 특별한 날, 설날은 쉬지만 추석은 예외로 먼 곳으로 출타를 간다던지, 병환으로 자리보전을 제외하고는 논밭에서 살았다. 농한기인 겨울철이라고 다르지 않아 폭설이 내리지 않은 한 땔감을 구하려 산으로 가시고 하셨다. 농촌에서 같은 지붕아래 한솥밥을 먹는 식구지만 끼니때를 제외하면 집에서 뵙기는 가뭄에 콩 나듯 했다. 그때는 그 세월이 원망스럽고 미웠으며 간혹 정말 아들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면 괜히 서럽기까지 했다.
이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 평등하듯 홀연히 떠나가신 것이다. 떠나고 나면 훌훌 털어 생각에서 멀어질 것 같은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그립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농사에 대한 악착같은 생활신조로 인해 두메산골이지만 보릿고개를 겪으면서도 배 굶는 날이 없었다. 또한 배움만이 가난을 이기는 길이라는 신조는 일찍이 한글과 산수, 약간의 한자를 깨치게 만들었고 회초리라는 매움이 적잖게 따라다녔지만 학교서 나름 인정을 받는 계기를 주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버지의 슬하에서 부지런함과 절약, 절재의 배움은 어떤 역경 앞에서도 굴하지 않은 강한 정신력으로 생활신조로 자리한다.
어느 해 가을, 그 날은 안개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앞산도 지워지고 숲도 나무도 지우개로 지운 듯 사방천지가 뿌옇기만 했다. 태양이 가려져 오밤중인 듯 거무튀튀하고 칙칙한 물비린내가 밖으로 나간 사람도 집으로 불러들이는 그런 아침이었다.
손톱으로 눈곱을 떼며 들어서는 안방에는 이부자리가 한쪽구석으로 밀려나 베개 두개를 머리에 이고선 차곡차곡 가지런했다. 역시나 아버지의 자리는 썰렁하게 비워졌고 그 자리엔 아침을 기다리는 둘레상이 차지하고 있었다. 애호박채가 몸을 뒤집는 된장국을 마지막으로 아침상을 차린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부르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통마루(툇마루)끝에 까치발로 훌쩍 선 뒤 두 손을 나팔처럼 동그랗게 모아 보이지 않은 허공을 향해 "아버지"하자 하늘에서 들리는 듯 "오냐"하신다. 신기함에 젖어 더욱 힘차게 "아침 잡수세요!"하자 이번에도 메아리로 돌아오듯 "간다."하신다.
지금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로 어머니와 함께 국립 영천 호국원에 나란히 잠들어 계신다. 조금은 과격하고 고집을 앞세웠지만 늦게나마 그 모든 과정이 가족의 편안과 자식들의 앞날이 좀 더 윤택해지길 바라는 염원임을 알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명절이면 늘 인사를 드리려간다. 이번 추석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날에는 안개가 많이 끼었으면 좋겠다. 아주 앞이 보이지 않게, 아니 그보다도 지독하여 당달봉사라도 된 듯 말이다. 그러면 주과포를 진설하고 청작서수(淸酌庶羞), 어릴 적 통마루 끝에 섰던 그 옛날처럼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하늘을 향해서 목청껏 불러보리라!
"아버지 어머니"하고 외치고 "오냐"하는 답이 메아리로 들리면 다시 한 번 더 크게 소리치리라!
"저희들이 왔습니다. 어서 내려오세요!"
이원선 시니어매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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