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언미의 찬란한 예술의 기억] 우리가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입력 2020-06-17 17:00:00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코로나19가 문화예술계에서도 끝없는 화두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러온 온라인 공연‧전시로 인해, '관객 수'가 어느새 '접속자 수'라는 단어로 바뀌고 있다. 문화예술계 곳곳에서 시도하고 있는 이런 형태의 소통 방법이 과연 코로나19가 앞당긴 미래의 모습인가. 문화예술의 '쓸모'에 대한 고민이 끝없는 이때,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 부분에 대해 잘 써 주실 텐데, 진단을 잘 해주실 분인데….' 그는 이처럼 항상 '급할 때'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이필동(1944~2008) 선생님이다.

2008년 5월 초, 그와의 약속이 있었다. 약속일을 며칠 앞두고 그는 다리와 허리 통증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정밀 검진 권유를 받았던 것 같다. "병원에서 검진을 좀 상세하게 받아야 하니 다음에 만나자."는 전화를 걸어온 것이 그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그는 폐암으로 두 달 남짓 짧은 투병생활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서울을 비롯해 다른 지역 연극인들을 만나면 '아성이 없으니 대구 갈 일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예명 '아성(雅聲)'을 전국 연극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새 대구에서도 '아성'의 이름을 들을 일이 거의 없어졌다.

대구 예술사를 정리하려면 더 늦기 전에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하기에, 그가 생전에 부인과 함께 살았던 자택을 방문했다. 십 수 년 만이었다. '그'만 그곳에 없었을 뿐,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수집한 책과 잡지들 그리고 하나하나 메모를 곁들여 보관한 공연 사진과 팸플릿까지…. 아직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물건들을 보며 다시 그를 떠올렸다.

이필동 선생님은 경북고 재학시절이던 1961년, 차범석 작 '밀주'에 배우로 출연하면서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라벌 예술대학(현 중앙대)으로 진학해 연기공부에 매달렸다. 이후 대구로 내려와 40여 년간 배우로, 연출자로 향토 연극계를 일구고 지켰다. 그의 이력을 돌이켜 보면, 대구 연극을 위해 살아온 삶 그 자체란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는 1967년 극단 인간무대를 창단했고 극단 공간을 거쳐 극단 원각사를 창단해 활발한 연극 활동을 펼쳤다. 1982년에는 누리예술극장을 개관하여 소극장 운동의 터를 다져놓기도 했다. 또 자신의 연극관을 바탕으로 한 연극 입문서 "무대예술입문"을 1983년 발간했고, 1995년에는 "대구연극사"를 발간하여 대구 연극의 맥을 보여주었다. 연극뿐만 아니라 대구예술 전반에 걸친 사료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때, 그의 "대구연극사"로 인해 대구 연극인들의 활동은 한국 연극이라는 큰 줄기 아래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10년 후인 2005년에는 수정판으로 "새로 쓴 대구연극사"를 펴냈다.

두 번이나 집필한 "대구연극사"를 봐도 알 수 있듯 선생님은 현장 연극 작업 중에서도 항상 탐구하는 자세를 지켰다. 그는 실질적으로 이론과 실기를 겸하는 한국의 몇 안 되는 현장연출가였다. 그 밑바탕에는 항상 책을 가까이 하는 습관이 있었다. 대구에 연극박물관이 필요하다면서 생활비를 쪼개 수천 권의 연극 관련 책자와 자료들을 수집했다.

그는 책과 잡지, 신문 등 활자매체로 된 자료 수집에 관심이 많았다. 수십 년에 걸쳐 신문․잡지 창간호를 수집했다. 인쇄매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에 대해 그는 "텔레비전과 영화가 등장했을 때, 연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현재는 함께 공존하며 살아남아 있듯, 인터넷을 통해 지식을 공급 받지만 진짜 지식은 책을 통해 남게 된다"며 인쇄매체의 생명력을 확신하곤 했다.

그는 일평생 연극뿐만 아니라 예술계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했고 여러 형태의 문화운동에도 힘썼다. 이필동 선생님은 '대구문화' 기고를 통해 '예술은 이미 죽고 예술가만 목숨을 연명하게 되는 상태'를 지적하며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 글의 함의를 모르는 바 아니나, 선생님이 떠난 지금은 그의 인생이 너무나 짧았던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부재의 공간'에서 선생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여러 가지 자료를 기증받기로 했다. 아이러니하지만, 선생님의 발자취가 흩어지지 않고 한데 모이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취가 모이는 곳이 바로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가 자리할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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