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영 대구미술관 교육팀장
1980년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점철되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의 민주화 시위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항쟁은 학생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참여하여 민주화를 향한 목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결국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수용되기까지 민주화 운동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때에 노동자, 약자를 대변하고, 현실을 비판하는 등 시대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이 민중미술이었다. 대표적인 그룹으로 1979년과 1980년 사이 창립된 '현실과 발언' 은 '현실이란 무엇인가?' '현실을 어떻게 보고 느끼는가?' '발언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이뤄지는가?' 등과 같은 비판적인 테제에서 출발하여 현실과 미술의 만남을 시도하였다.
서울 경기를 비롯해 많은 지역에서 민중미술 집단이 생기고 움직임이 일었지만, 1980년대의 대구 화단은 구상과 추상의 구도의 형식주의적인 경향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화랑가에서는 시대를 비추는 전시가 열렸다. 1981년에는 대백화랑에서 '현실과 발언' 초대전이, 1984년에는 '시대정신' 순회전이 수화랑에서 열려 현실참여 예술의 면모를 소개하였다. 이때 대구에서도 민중미술 그룹이 탄생하였는데, 그 시작은 1983년에는 '회화9인'전(중앙미술관)이었다. 회화 9인전의 멤버 중 정하수, 박용진, 양호규, 정해균이 결성한 '인간'전(중앙미술관)이 1984년에, 1985년에는 정비파, 박용진, 정비파, 양호규, 오석찬이 참여한 '지금 우리는'전(수화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정하수가 있었다. 1980년대에 그의 작업실 '투명화실'은 민중미술가들의 교류 거점이 되었다. 2018년 아트클럽삼덕에서는 '2018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을 찾아서'전을 통해 대구 1세대 민중미술가 정하수를 재조명하였다. 그는 강필로 새긴 갯벌 사람들의 모습에서 보듯 처음의 마음처럼 '삶의 밑바닥에 깔린 사람들의 건강한 생명력'(회화9인전, 정하수의 글)을 묵묵히 지켜오고 있었다.
이러한 형상미술의 유행은 단지 국내의 상황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신표현주의가, 미국에서는 신미술과 같은 구상성이 강한 작품이 유행하였다. 이 시기 해외에 머물던 작가 중에는 외면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낸 이들도 있었다. 권정호는 198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그 자신의 삶에 자리한 심연의 공포와 불안을 마주하게 되었다. 현대적인 도시, 뉴욕에서 겪은 인간의 삶, 멀리서 바라본 야만적인 한국의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어느 날 밤'(1985), '소리'(1985)를 비롯해 '해골 시리즈' 작품에 표현되었다. 일본 유학중이었던 송광익은 작품 '당신의 공간은'(1982)을 기타큐슈 비엔날레에 출품하였다. 황무지의 화면 위에 얕게 내려앉은 하늘, 뒤를 돌아앉아 있는 민머리의 남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그물로 덮여있었다. 당시 '그물작업 시리즈'에서 그는 자신이 본 한국의 충격적인 상황을 모두 그물로 씌워버렸다.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TK를 제조·첨단 산업 지역으로"…李 청사진에 기대감도 들썩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사설] 민주당 '정치 복원' 의지 있다면, 국민의힘에 법사위원장 넘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