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아의 북돋움] 인삼밭에 낀 고구마

입력 2020-06-10 17:30:00

김은아 그림책 칼럼니스트
김은아 그림책 칼럼니스트

'거 참, 인색하네! 저렇게 매사 아껴서 부자 되겠어.' 돈이든, 수고든, 정성이든 내놓는 데 인색한 사람들을 볼 때면 이 말이 절로 나온다. '인색하다'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재물을 아끼는 태도가 몹시 지나치다', '어떤 일을 하는 데 대하여 지나치게 박하다'라고 되어 있다.

'돈에 인색하다'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칭찬에 인색하다' '마음 씀씀이가 인색하다'라는 말이 나올 법한 상황도 자주 겪는다.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한국 사람들은 웃음에도 좀 인색한 듯하다. 유쾌하고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능력과 장점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사람들도 많이 본다. 상대방이 잘하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한 수 배울 수 있는 스승이 생길 텐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색함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시기심과 아주 비슷하며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색함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지 않으려는 행동에서 표출되는 심리 기제라는 것이다. 이런 심리가 강한 유형의 사람은 사회 전체나 개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에 인색하며 오직 자신만의 '가련한 보물'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주위에 높은 벽을 쌓는다. 인색함은 공명심과 허영심, 질투심과도 관련이 있는데 이는 '아들러의 인간이해'(을유문화사)에 잘 나와 있다.

주위에 마음 씀씀이가 인색한 사람들이 많은 세태를 반영해서인가. 고구마를 주인공으로 한 네 컷 만화가 몇 년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500만 뷰를 달성하며 화제가 되었다.

인삼밭에서 자신을 인삼이라 믿으며 살고 있는 고구마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매일 콧노래를 부른다. 옆에 있던 인삼은 그런 고구마가 자꾸만 신경 쓰인다. 인삼도 아니면서 저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인삼은 고구마를 질투하기 시작한다. 인삼도 아니면서 행복해 하다니…. 아무나 인삼이 되어서는 안 돼. 그건 고구마의 몫이 아니야. 그래서 인삼은 기어코 고구마의 정체를 알린다. 잠시 후, 고구마는 "내가 고구마라고? 아~ 나는 고구마다! 고구마∼ 나는~ 고구마!" 이렇게 콧노래를 부르며 여전히 행복해 한다.

그래서 제목이 '행복한 고구마'이다. 만화책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 합시다'(위즈덤하우스)에도 실려 있다. 인삼도 아니면서 행복해 하는 고구마를 신경 쓰느라 불행해져버린 인삼의 이야기이다. 고구마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됐을 때 인삼이 기대한 반응은 이랬을 것이다. "으악! 내가 고구마라고?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 죽어버릴 거야."

자신의 예상과 달라도 너무나 다른 고구마의 반응을 본 인삼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고구마의 행복을 저지하며 사는 것이 일생의 목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예측해 본다. 막장 드라마에서 악인이 착한 주인공의 성공과 행복을 막느라 정작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왜 그랬냐고 따져 물으면 악인은 결핍으로 불행했던 자신의 과거를 토해내며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고 변명을 늘어놓느라 바쁘다.

그런데 인삼은 악인의 경우와 다르게 좋은 배경을 가졌다. 굳이 고구마에게 진실을 알려줄 결핍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데 마음 씀씀이가 참 인색하다. 고 박경리 선생의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에 '사람의 됨됨이'란 제목의 시가 있다.

"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 (중략) 나는 인색함으로 하여/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더러 보아왔다/ 심성이 후하여/ 넉넉하고 생기에 찬 인생도/ 더러 보아 왔다/ (중략) 사람 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 후한 사람은 늘 성취감을 맛보지만/ 인색한 사람은 먹어도 늘 배가 고프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

'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라는 박경리 선생의 통찰이 주는 울림은 크다. 아들러식 표현으로 '가련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정작 나도 모르게 인색하게 행동한 적은 없는지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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