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2004년
"이 무신 날벼락이고?"
8층에 사는 아줌마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신 누르더니, 내 인기척에 하소연을 한다. 층을 표시하는 등이 꺼진 걸 보니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난 모양이다. 예기치 못한 일에 당황스럽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고장 났으니, 계단으로 올라가자는 내 말에 그녀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육중한 상체를 지탱하는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녀 팔을 잡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사색이 된 그녀의 얼굴은 땀범벅이었다. 헉헉대는 그녀를 부축하고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냉수 한 잔을 벌컥 마시며, 습관적으로 TV 뉴스채널을 틀었다.
코로나19 확진 환자에 관한 뉴스가 하루도 빠짐없이 나온 게 넉 달이 넘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생이나, 초고속 엘레베이터 타는 생이나 코로나 19의 위협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예기치 않게 내 일상을 바꾸어 놓은 삶 앞에서 '자기 앞의 생' 이란 책 제목을 보고 지나치기 어려웠다. 내 앞에 놓인 생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고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에 대해 가르쳐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14살에 어머니와 단 둘이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는 1934년 단편소설 '소나기'로 등단했다.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를 썼으며,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써 콩쿠르 상을 받았다.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라는 사실은 1980년 그의 유서를 통해 밝혀졌다.
작가는 '자기 앞의 생' 첫 장 첫 줄에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의 칠층에 살고 있었다" 를. 마지막 장 마지막 줄은 "사랑해야 한다"로 끝을 맺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7층. 아우슈비츠의 기억에 시달리는 로자 아줌마와 맹랑한 아랍인 꼬마 모모가 함께 사는 곳이다. 늙고 병들어 치매기까지 있는 로자 아줌마는 창녀의 자식들을 키우며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모모는 그 아이들 중 하나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열네 살 모모가 길거리 여자들이 낳은 아이들을 몰래 봐주는 일을 하는 로자 아줌마와 변두리 생이지만 정이 넘치는 이웃들과 함께 지냈던 자신의 생, 한 시기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작가의 작품이든 작품 속에 작가의 생이 스며들어있다. 이 책 속에 소외, 고독, 전쟁, 불평등이 그려진 것 또한 작가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174쪽)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 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 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93쪽) 이 말들에 밑줄을 그었다.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모모, 모모!"를 불렀다. 세상의 모든 모모들이 다 들을 수 있게. 쉽지만은 않은 생,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는 구차한 변명을 숨기면서. 내가 잘 났다. 네가 잘 났다. 목청 돋운 게 창피하다. 대구에 코로나 19확진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을 때, 공포감과 불안감이 엄습했다. 전국 각지에서 의료인들이 도움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고 대구로 달려 와 주었을 때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라는 용기를 주는 사랑 앞에 고개 숙였다.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또 자신이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며, 누군가가 나를 보아주는 사람이 있는 한 그 삶은 의미를 갖는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책 제목 '자기 앞의 생',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는데 배신하지 않았다.
최지혜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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