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보수와 진보, 그게 뭐라고

입력 2020-05-10 17:30:00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공동대표
서구 사회서 나온 보수·진보 개념, 몇 년 새 우리 사회 전반으로 번져
개인 정체성 무시 단순 구분 문제
틀에 끼워 맞추는 사고 탈피해야

권은태(사)대구콘텐츠플랫폼 공동대표
권은태(사)대구콘텐츠플랫폼 공동대표

아직도 낯설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말들이 그렇다. 원래는 사회과학 서적에서나 봄 직한 단어였다. 보수와 진보의 개념 또한 서구 사회의 역사와 정치적 배경에서 나온 터라 우리와 잘 맞지도 않았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일상 깊숙이 들어와 온갖 곳에 쓰이는 범용어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익숙지는 않다. 내가 '보수적 인간'이어서 그런지 좀처럼 '보던 굿' 같지가 않고 '먹던 떡' 같지도 않다. 누구는 세상 모든 복잡한 것들을 심플하게 딱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어 좋고 이것저것 뭉뚱그려 한마디로 표현할 때도 편리하다지만 난 아니다. 가끔 말이나 글의 빈자리를 채워 넣을 때 요긴하게 쓰이지만 그렇다고 생광스럽진 않다. 오히려 안다고 여겼던 것까지 자꾸 '진보와 보수'로 갱신되니 다시 살펴보느라 번거롭고 귀찮을 뿐이다.

하지만 나야 그렇든 말든 지금, 세상만사를 '보수와 진보', 정확히는 보수와 진보라는 틀, 프레임, 얼개, 뭐 그런 것들에 끼워 맞추려는 흐름은 거의 대세가 되었다. 이미 지난 것들도 '보수와 진보'의 틀에 맞춰 다시 정의하고 오늘 일어난 일들은 '보수와 진보'의 잣대로 재며 앞으로 일어날 일 또한 '보수와 진보'의 관점으로 분석하고 예측한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과 나아갈 바를 '보수와 진보'의 기준에 따라 배분한다.

지난달 있었던 정원식 전 국무총리의 별세 소식도 그래서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그가 '보수 원로'였다는 것을 이번에 뉴스를 보고 처음 알았다. 제6공화국 시절의 관료였고 보수와는 배치되는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를 지지한 인물로 기억하고 있었던 그가 보수주의자였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그의 이름 앞뒤 어디에도 '보수'라는 말이 붙지 않았다. 그가 정말로 보수주의자였다면 거의 모든 것에 접두어처럼 '보수와 진보'를 갖다 붙이는 요즘의 유행 덕에 그의 정체성이 확인된 셈이다. 잘 믿기진 않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모든 것을 '보수와 진보로만' 나누려는 시도는 자주 다른 것을 다르지 않게 만든다. "이번 선거의 결과는 이른바 보수 정당의 참패였습니다. 오늘은 보수 정당의 혁신 방안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이건 우리 지역의 한 방송사가 2년 전 6·13 지방선거 직후에 편성한 TV 토론 프로그램의 오프닝 멘트였다. 그게 이번 4·15 총선 직후의 방송에선 이랬다. "이번 선거에서 보수 진영은 유례없는 참패를 기록했습니다." 둘의 '싱크로율'이 거의 100에 가깝다. 사람도, 정당도, 선거의 종류도 달랐지만 오직 하나, '보수 대 진보'만 남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50대의 김 모 씨는 광주에 산다. 그는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오래된 것, 질서와 도덕, 그리고 다양성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걸 보면, 그리고 이런 사람을 '보수적'이라고 한 러셀 커크(Russell Kirk)의 기준에 비춰 보면 김 모 씨는 보수주의자임에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가 여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진보적인 사람이 되었다. 언론이, 여론조사기관이 그렇게 확정해 버렸다. 그는 옛날 평화민주당도 지지했지만 그땐 아무도 자신을 진보라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 한 주요 일간지가 보수와 진보를 가려 주는,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소름 돋게 잘 맞는다'는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게 좀 황당하다. 삶을 대하는 태도나 가치에 관한 질문은 하나도 없다. 어떻게든 국민을 '진보와 보수'로 나누고야 말겠다는 의지만 돋보인다. 심지어 어떤 건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결국 현 정부를 지지하면 진보, 반대하면 보수가 될 뿐이다. 며칠 전엔 한 인터넷 언론사가 '국민의 정치 성향, 범진보 45.0% 범보수 40.07%'라는 제목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범' 자 하나 보태서 국민을 딱 떨어지게 둘로 나눠 놓은 셈이다.

사실, 보수와 진보의 대립보다 보수 아닌 것을 보수라 하고 진보 아닌 것을 진보라 하는 데서 생기는 사회적 오류와 문제가 더 크다. 그 틈을 타 누구는 돈을 벌고 누구는 표를 더 얻고 또 누구는 자기가 지은 죄를 감춘다. 그러니 우리의 정체성을 함부로 규정당하지 말자. 그리고 '보수와 진보'라는 말도 좀 덜 쓰자.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꽤 좋아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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