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차지할 몫은 하느님 뿐" 제단 앞에 엎드려 순종 맹세
신부의 길 입성-참회 끝에 영적 기쁨 만끽…대구 계산성당 사제 서품 거행
삶의 버팀목들-아버지 같은 주교·봉사 정신 가르친 형·끝없는 사랑 어머니
겸손한 리더십-후배 영명축일마다 직접 전화 돌리며 몸 낮추고 나눔 실천
◆ 갈등과 유혹을 이기고
혜화동 신학교로 복학하기 전에도 갈등과 유혹의 흔들림은 그치지 않았다. 청혼을 받은 적도 있다. 가난한 형편을 따지며 '형이 신부가 됐는데 또 신부가 돼야겠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다니던 성요셉성당(현 대구 남산성당)의 장병화 신부(후일 마산교구장)에게 진로를 상의했다. 신부가 돼도 집안 걱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자에게 쉽게 마음을 뺏길 것 같다고 약점을 부풀려 털어놓았다. "자신의 약점이 뭔지 잘 알아야 이겨내고 성덕을 쌓는다. 그러기에 자네는 꼭 신부가 돼야 한다"며 길을 열어 준 장 신부를 은인으로 여겼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둘째 형도 "나 때문에 네 앞길을 막을 수 없다"며 어머니의 소망대로 사제의 길을 가라고 권했다.
대신학생 시절 삭발례를 했다. '내가 차지할 수 있는 몫은 하느님밖에 없다'는 영적 기쁨을 얻었다.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당시 '하느님 당원'이라는 마음가짐 덕에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스승 공베르 신부의 사제수품 50주년 기념일 날 전쟁이 터졌다. 후배들의 손을 잡고 피난열차를 탔다. 피난길을 마다한 스승들은 죽음의 행진에 끌려가 순교했다.
거리마다 피난민으로 넘쳐나던 1951년, 대구교구 최덕홍 주교가 사제품 받을 날을 잡으라고 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인 9월 15일을 택했다. 사목 표어로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골랐다. 애초엔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로 하려 했다. 그러나 "내가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고백해야 할 말은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외에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바꿨다. 죄인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참회와 고백은 평생토록 이어졌다. 말년에도 "하느님 앞에 가서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며 고개를 숙였다.

◆계산성당
대구 계산성당(주교좌계산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열셋에 집을 떠나 열여덟 해만에 신부가 됐다. 제단 아래 엎드려 순종을 맹세했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제일 앞자리에 앉은 어머니가 두 손을 모은 채 지켜봤다. 수품 다음날 성요셉성당에서 첫 미사를 올렸다. 대구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성요셉성당은 성모당 위에 자리해 웃 성당으로도 불렸다.
추기경은 유아세례도 계산성당에서 받았다. 올 초 한국교회사연구소가 발간한 김수환 추기경 유물 자료집에는 세례대장과 견진대장이 공개됐다. 대구대교구 사료실이 보관하고 있는 1922년 7월 25일자 세례대장에는 '대구성당(계산성당)에서 대구대목구 부주교 베르모렐 신부에게 김 요셉과 서 마르티나 사이 남산동에서 7월 2일 태어난 아기가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였다. 두 달 뒤 견진성사 대장에 기록된 주소는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이었다.
늦둥이 아들을 본 신자로부터 '아들 이름을 김수환 스테파노로 정했다'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답장을 보냈다. '죄 많은 저처럼 키우지 마시고 초대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처럼 키우세요'.
계산성당은 영남 전교의 소명을 받은 로베르 신부가 대구에서 처음으로 세웠다. 성당 초입의 작은 정원에는 그의 흉상이 서 있다. 성당 100여 년 세월을 담은 사진도 전시돼 있다. 초기 한옥 성당 건물과 대구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 해성재 옛 사진도 있다. 국채보상운동 관서지부장을 맡기도 했던 안중근 의사도 해성재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치마저고리 차림의 수녀들과 소풍가는 학생들은 당시 대구에서는 처음 보는 구경거리였다. 한옥 건물이 불탄 뒤 새로 세워진 성당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았다. '박정희 양과 육영수 군'의 일화를 남긴 박 전 대통령의 결혼사진도 있다. 후일 철권 통치자의 장례식에서 추기경은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성당 담을 끼고 이어진 골목은 과거가 살아있는 대구 골목투어의 출발점이다. 서상돈과 이상화 고택, 마당 깊은집, 뽕나무거리, 영남대로에서 청라언덕과 제일교회, 약전골목, 진골목, 관덕정, 경상감영, 서문시장까지 역사와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무대들이 펼쳐진다.

◆ 어머니와 주교
비서로 모신 대구교구장인 최덕홍 주교는 추기경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주교는 어릴 적부터 알던 추기경에게 입던 옷도 물려주고 잘못하면 스스럼없이 바보 같은 녀석이라며 혼도 냈다. 비서일은 외부 수행이나 통역 정도라 남는 시간에 고교생 단체 지도를 맡았다. 이 중에는 당시 경북고교생이던 이문희 대주교도 있었다.
교구 비서시절 의지하던 주교와 어머니를 잃었다. 주교 장례를 상주된 마음으로 치렀다. 어머니는 주교관 담장 뒤편에 마련한 낡은 집에서 모셨다. 중풍으로 쓰러진 뒤 어머니는 사순절 둘째 영복날 죽고 싶다는 말을 곧잘 했다. 이 날 죽으면 천당 간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바로 그날 어머니는 불편한 걸음으로 남산성당을 찾았다.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평생 지은 죄를 고백한 뒤 막내아들 무릎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든 것을 내어주고 무엇이라도 받아주며, 어떤 허물도 덮어주고 용서해 준 어머니의 사랑이 떠나갔다. 추기경은 말년에 "평생 사랑이란 말을 가장 많이 했지만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다"고 참회했다.

◆대구교구 성직자묘지
대구교구청 안에는 드망즈 주교의 소원대로 학교와 주교관 성모당과 성당이 한데 모여 있다.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기념관, 성유스티노신학교 100주년 기념관이 서있고 길 건너에는 수녀원도 함께한다. 백년 된 성직자묘지도 있다.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가 같은 공간에 함께 숨 쉬고 있다.
드망즈 주교 등 예순여섯 사제가 잠든 성직자묘지에는 추기경의 형 김동한(가롤로) 신부도 영면해 있다. 추기경에게 형은 어머니 다음으로 정이 깊은 분이었다. 군종신부를 마친 뒤 형은 결핵요양원(대구요양원)을 인수해 환자들의 치료와 재활에 자신을 바쳤다. 결핵을 앓은 적이 있었기에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깊이 알고 있었다. 감당 못할 형편에도 퍼줄 줄만 알던 그를 두고 남들은 어리석다고 했다. 고통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아는 법, 외면하고 버릴 수 없었다. 하도 딱해 추기경도 환자수를 줄이라고 권했다.

형의 열정에 신자들이 만든 후원회 밀알은 4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신부의 정신을 기리며 봉사와 기부를 잇고 있다. 교구청 앞에는 사랑의 실천을 가르친 예수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성직자묘지 입구의 라틴어 글귀는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다. 앞과 뒤만 있을 뿐인 죽음을 통해 삶을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어떻게 살아왔든 누구나 죽음 앞에선 무릎을 꿇는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무상한 삶의 여정에서 겸손하라고 한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며 하늘에 순종하는 겸손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시대의 어른이던 추기경의 리더십 원천을 많은 사람들이 겸손에서 찾았다. 추기경은 후배 신부들의 영명축일이면 직접 전화를 했다. '설마 추기경이'라며 장난전화라고 여겨 "네가 추기경이면 나는 교황이다"고 한 신부들이 민망스러워했다.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는 가르침을 따르려 한 추기경이었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