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젊음이 그만 라면 같아라

입력 2020-05-08 17:30:00

박민경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조사관

박민경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조사관
박민경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인권사무소 조사관

1986년. 외사촌 언니들이 직장을, 학업을 이유로 대구로 나와 우리 집 근처에 셋방을 얻었다. 언니들이 근처에 있어 가장 좋은 이유는 그 셋방에 놀러 가면 늘 곤로에 끓여낸 라면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라면을 앞에 놓고 길쭉한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채널을 맞춘 9시 뉴스는 온통 아시안게임 이야기였다. 그중에 단연 화제는 임춘애였다. 육상에서 우리에게 금메달을 안겨준 그녀는 너무나 가난하고 힘들어 라면만 먹고 뛰었다고 했다. 내 앞에 차려진 이 맛있는 라면과 임춘애의 고단함이나, 퇴근한 언니들의 피곤함을 연결해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30년이 지난 2016년. 서울 구의역에서 홀로 지하철 전동문을 수리하던 김 군이라는 청년이 죽었다. 김 군의 가방에서는 엄마가 밥이라도 같이 먹으라며 챙겨준 숟가락과 컵라면이 나왔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노동하다 사망한 김용균 씨의 마지막 유품도 컵라면이었다. 제시간에 따뜻한 김이 나는 밥 한 그릇 먹을 시간도 없이 고단한 그들의, 노동의 마지막 음식이 컵라면이었다. 그들의 라면은 삼십 년 전 가난하고 힘들어 뛰었다는 임춘애의 라면과 분명히 노동으로 고단했을 외사촌 언니들이 끓여낸 라면과 겹쳐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천에서, 구미에서 아니 대한민국 곳곳에서 청년들은 노동 현장에서 떨어지고 깔리고 불에 타서 혹은 스스로 죽어갔다. 죽음의 순간에도 비정규직, 일용직, 임시직, 계약직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청년들의 목숨이 오 분이면 혹은 삼 분이면 뚝딱 완성되어 젓가락질 몇 번이면 끼니가 해결되는 라면 같았다.

소중하지 않은 목숨은 없지만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젊음이 살아남기 위해 노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게 노동해야 하는 이유는 물려받은 것이 없어서일 것이다. '수저'라는 신종 계급론에 따르면 금수저를 가지지 못했기에 죽음을 목전에 둔 노동 현장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동은 의무이기 이전에 권리다. 인간이 누려야 하는 존엄한 가치로서의 권리가 된다. 세계인권선언 23조와 24조는 노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유리한 노동 조건에서 일하며 실업에 대한 보호의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차별 없이 동일한 노동에 대하여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지며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정기적인 유급휴가와 휴식과 여가를 누릴 권리도 가질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공동체 유지를 위해 건강한 노동을 지속해야 할 의무는 있지만, 노동은 인간이 가져야 할 권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오히려 젊은 노동이 안전하도록, 차별받지 않도록 건강한 노동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는 국가가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노동이 계급으로 차별받지 않도록 제도와 경제 구조를 개선해야 할 의무도 젊은 노동자가 아니라 국가에 있을 것이다.

그 시절 외사촌 언니들의 젊음도 쌀밥에 반찬을 차려내 먹고 다니기에 버거웠을 것이다. 그래서 가벼운 라면이 주식이 되었을 것이다. 임춘애 역시 라면 발언은 오해로 밝혀지긴 했지만 30년 전 청년들의 가난함과 고단함을 상징하는 것이 라면이었기에 그런 오해도 당연히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아름답고 고귀한 젊음의 노동의 대가가 오백원에서 천원 하는 라면으로 메꾸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젊음들의 허기진 노동 역시 라면 한 그릇으로 충족되는 가치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노동에 예속되는 삶을 사는 젊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 삶을 위해 존재하는 노동이었으면 좋겠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