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영 대구미술관 교육팀장
일제강점기 1922년 만들어진 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는 예술가들의 등용문과 같은 체계를 갖추었다. 당시 조선미술전람회가 주목한 취향은 목가적인 농촌풍경과 같은 조선의 정취, 미술의 지방색, 향토성에 관심을 가졌다.
1930년대에 들어 향토색론은 몇몇 미술비평가에 의해 좀 더 구체적으로 미학적 관점에서 주장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근원 김용준(1904-1967)이다. 그는 경북 선산 출생으로 중앙고보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화가이기도 하지만 미술비평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에게 1930년은 중요한 시점인데, 이때 그는 여러 전시의 창립에 관여하였고, 이들 전시의 창립의 변에서 자신의 관점을 밝혔다. 먼저 동경미술학교 출신자들로 구성된 단체 동미전(東美展)의 창립전에서 그는 '조선의 예술은 서구를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며, 민족주의적 입장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진실로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율조를 찾는 것'이라면서 조선 미의 본질적 특징을 찾으려 하였다. 또한 같은 해 겨울 백만양화회(白蠻洋畵會)를 발족하면서 그는 예술의 순수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김용준이 활발한 비평을 이어가던 1930년에 대구에서 '향토회'가 창립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향토회는 '순수 양화를 연구하는 단체'로 1930년부터 1935년까지 6년간 전시를 개최하였고, 첫해 전시에는 박명조, 서동진, 최화수, 김용준, 이인성, 김성암과 같은 대구 미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미술가들이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그는 주활동지가 서울이어서 이 단체를 통해 그의 향토색론을 구체화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향토회 활동의 결과로 향토 정조를 구현한 작가가 나타나는 데 일조했다고는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이인성이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이인성의 작품 '세모가경'에 대해 평론가 윤희순은 향토적인 제재의 나열이 아닌 '세모가경에서 고담적량(枯淡寂凉)한 조선의 공기가 창일함'과 같은 조선의 정서가 작가의 감각에 의해 구현되었음을 칭찬하였다. 이인성의 '가을 어느날'(1934), '경주의 산곡에서'(1935)와 같은 작품에서는 붉은 흙, 민족을 상징하는 소재, 비애의 정서 등 민족적 특징을 묘사하였다. 하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작가의 출중한 재능만큼 작품에서 보여준 그의 상징적 시도들이 과연 당대 사회현실을 반영했던가에 대한 논란을 낳기도 한다.
김용준의 향토색론 역시 논란이 되었다. 그의 이론은 분명 민족적 정서나 미감을 정의하려는 것이었고, 비록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지만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찬미, 패배주의적 미와 같은 향토적 소재로 소박한 현실에 안주하도록 함으로써 일제강점기 통치자의 논리에 부합되어버리는 한계를 드러냈다.
오늘 선거일을 맞고 보니 그들의 예술과 학문의 한계보다는 그들이 처했을 시대의 한계가 더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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