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갈피] 역병 이후

입력 2020-03-30 18:00:00

박 원 재 율곡연구원장
박 원 재 율곡연구원장

얼마 전, 여러 일간지 북 섹션에 책이 한 권 소개되었다.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Cosmos: Possible World)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감이 빠른 분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1996년에 작고한 유명한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의 베스트셀러 '코스모스'의 후속작이다. 저자는 칼 세이건의 후반부 인생을 함께했던 세 번째 부인 앤 드루얀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1980년 TV 다큐멘터리와 책으로 선을 보이면서 전 세계적으로 우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이끌어냈다. 앤 드루얀은 이때부터 칼 세이건과 작업을 함께한 동료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아직 읽어보지 못한 터라 내용을 코멘트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여러 매체의 신간 소개란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앤 드루얀의 책은 '코스모스'에 담긴 메시지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그 후에 새롭게 알려진 과학적 사실들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에서는 과학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가 직면하고 있거나 또 직면하게 될 위기들을 극복하고 인류를 지속 가능한 미래로 이끌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칼 세이건과 관련해서는 널리 알려진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0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쏘아 올린 우주탐사선 보이저1호는 태양계에 대한 탐사를 마치고 성간우주로 들어가기 위해 태양계의 끝자리 명왕성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이때 칼 세이건은 나사에 보이저1호의 카메라 방향을 180도로 돌려 지구를 찍자고 제안했다. 혹독한 환경에서 비행하는 우주선에 예정에 없던 과업을 부과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들도 있었지만 칼 세이건은 이를 관철시켜 마침내 지구를 찍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하여 찍힌 지구의 모습은 광활한 우주 공간에 가늘게 이어진 긴 띠 속에 찍힌 아주 작은 한 개의 푸르스름한 점이었다. 그렇게 하여 지구에 붙여진 또 하나의 이름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

이 사진을 찍자고 고집한 의도에 대해 뒷날 세이건은 우리가 삶을 기탁하고 있는 지구의 소중함을 일깨워 하나뿐인 이 행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마침 나사에서도 지난달 이 유명한 사진을 새롭게 보정하여 해상도를 높인 버전을 일반에 공개하여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보정의 결과로 좀 더 선명해진 것은 붉은 기운에서 옅은 푸른 계열로 바뀐 배경의 색감일 뿐, 지구는 여전이 창백한 푸른 점 그대로였다.

역시 칼 세이건의 참신한 상상력으로 유명해진 우주력에 의거하면, 이 창백한 푸른 점은 우주가 가을로 접어드는 9월 1일경에 태어났다. 우주의 나이가 138억 년으로 추산되고, 지구의 나이가 그 3분의 1에 해당하는 46억 년쯤 된다니 말이다. 이 상상을 계속 이어가 보면 이렇다. 우주의 나이 138억 년을 1년으로 환산하면 한 달은 11억 년 남짓이고, 하루는 3천800만 년 어림이 된다. 이럴 경우, 포유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것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이고, 아기 공룡 둘리의 조상이 영문도 모른 채 멸종당한 것은 12월 30일 아침 녘이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태어난 것 또한 아무리 길게 잡아도 12월 31일 밤 11시 45분을 앞서지 않는다. 그리고 인류의 4대 문명이 시작된 것은 대략 밤 11시 59분 50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초쯤 전이다. 우리가 사는 창백한 푸른 점이 걸어온 시간의 궤적이다.

무생물이든 바이러스든 고등생명체든, 지구상의 모든 존재의 나이테 속에는 그렇게 얽히며 흘러온 자연사(自然史)의 흔적들이 퇴적되어 있다. 우리의 몸은 지구의 나이만큼 오래되었고, 우주의 나이만큼 늙은 것이다. 그것은 문명의 산물이기 이전에 자연사의 일부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역병은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역병 이전과 이후, 삶과 문명을 바라보는 태도에 아무런 변화의 단초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몸을 배우는 수업료는 더 비싸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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