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옛 이야기] 대구상업학교와 한지성의 항일운동

입력 2020-03-11 18:00:00

김태훈 대구 영남중 교사
김태훈 대구 영남중 교사

대구상원고등학교의 전신인 대구상업학교는 1923년에 개교하였다. 6·10만세운동 이후 대구상업학교 학생 이월봉과 장원수는 장적우가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전술의 함양을 목적으로 결성한 신우동맹(新友同盟)을 비롯해 이에 영향을 받은 혁우동맹(革友同盟), 적우동맹(赤友同盟), 일우동맹(一友同盟)에 각각 참여하였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영향에 힘입어 1930년 3월 4일 대구상업학교와 대구농림학교 학생들이 연합시위를 추진하려다가 경찰의 제지로 불발된 적도 있었다.

그해 12월 무렵 서오룡과 이동우 등은 대구상업학교 내에 지하조직으로 현재의 사회제도를 타파하고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프로과학연구소 조선 제1지국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동맹 휴학, 야학 강연, 반전 선전 등을 통해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 차별 대우를 배척하였고, 일제가 일으킨 만보산사건·동양척식주식회사의 착취·만주사변 등을 규탄하였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대구상업학교 정문택은 중일전쟁이 반드시 세계 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예측하여 1937년 9월부터 5명과 함께 몇 차례에 걸쳐 비밀결사를 구성하려다가 193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대구상업학교 4학년 이상호는 김상길·서상교와 뜻을 나누고 태극단(太極團)을 결성하였는데, 조선 민족의 이상적인 단결과 능률로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세계 인류의 영원한 평화·자유·평등을 찾는 것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학생들은 체력을 단련하고 과학을 연구함으로써 심신을 기르고 항일 의식을 고취시켜 조선 독립을 달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일반 조직으로 육성부의 1부와 관방국(비서관·부관·회계관)·체육국(무도부·군사부·경기부·등산부·씨름부)·과학국(박물부·이화부·항공부)의 3국을 두었다. 단장인 이상호가 육성부감과 체육국장을, 김상길이 관방국장을, 이준윤이 과학국장을 맡았다.

태극단은 다른 학교 및 다른 지역의 학생들을 가입시키고 건아대원(중학교 1·2학년 학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모집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간디와 쑨원 관련 서적을 읽으며 민족 의식을 드높였다. 항공부장 최두환은 '항공소년' 잡지를 구독하며 항공 연구에 몰두하였다. 심지어 일제 패전, 조선 독립 가능성 등의 내용이 적힌 전단을 살포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1943년 5월 결성식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단원 1명의 밀고로 인해 조직이 발각되어 대거 체포되었다. 이 중에 이준윤, 이원현, 이상호가 혹독한 고문에 의해 늑막염으로 순국하였다.

한편 경북 성주 출신으로 1931년 대구상업학교를 졸업한 한지성(韓志成)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의용대에 참여하였다. 한지성은 각 지역을 순회하며 선전 활동과 포로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후 한지성은 정치조 선전주임과 대본부 편집위원회 중문간 주편을 역임하며 '조선의용대통신'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한지성은 1941년 5월 외교주임에 선임되어 동남아 지역에서 반일운동을 강화하여 동방 피압박 민족과의 연대를 꾀하려고 홍콩에 파견되었다.

그러던 중 조선의용대가 1942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합류하여 김원봉이 제1지대장이 되었다. 이후 영국군이 일본군과 미얀마-인도 전선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영국군 총사령부의 군사 지원 요청에 의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인면전구공작대'('印'은 인도, '緬'은 미얀마)를 편성하여 한지성을 대장으로 9명을 인도 콜카타로 파견하였다. 인면전구공작대 부대장 문응국과 김상준·나동규 3인은 임팔에서 대적 방송, 문서 해독, 포로 심문 등의 공작을 펼쳤으며, 영국군 제17사단 전원을 일본군 제33사단의 포위를 뚫고 임팔로 무사히 귀환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로도 인면전구공작대는 만달래이 전투에 참전하여 영국군이 양곤을 탈환하는 데 기여하였다.

현재 대구상원고등학교 건물 뒤편에는 '태극단독립운동기념탑'이 있다. 탑에 새겨진 학생들의 빛나는 항일정신을 계승하고, 아울러 영국군에 배속되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첩보전에 동원되었던 인면전구공작대와 이를 이끌었던 한지성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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