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방희 시인의 시집 '사람 꽃'이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과 개성은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함축된 문장, 진솔하고 담백하면서도 촌철살인적인 시법, 현실 너머의 이데아 추구, 안팎으로 번지고 스미는 휴머니티다. 동화의 발상처럼 빈번하게 구사되는 활유법과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이고 미시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시각 아우르기 역시 특유의 시적 묘미를 증폭시켜 주기도 한다.
내 동맥動脈을 끊어
새파랗게 언
저 들녘의
겨울보리를 덥히랴!
ㅡ 「동맥冬麥」 전문
단 한 문장, 네 행, 네 연으로 짜인 이 시는 얼어붙은 겨울 들녘에서 인동(忍冬)하는 '동맥冬麥'을 내면으로 끌어당겨 화자의 '동맥動脈'에 흐르는 피로 덥혀보려 하듯, 보리에 인격을 부여하는 활유법이 구사되면서 물아일체의 경지를 떠올리고 있을 뿐 아니라 외부로 열리고 번지는 휴머니티를 시사하기도 한다.
같은 발음의 어휘를 통해 발화되는 의미의 비약과 그 비약을 추동하는 연상 기법의 언어감각도 돋보이는 이 시에서 자신의 혈관을 끊어 그 따뜻한 피로 언 들녘의 보리를 덥혀보려 하는 건 다른 한편으로 자기헌신과 아가페적인 사랑을 암시하면서 차가운 세상을 향한 일깨움의 의미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세상을 지우며
하얗게 눈 내렸다
새 세상에 나
또한 없으렷다!
ㅡ 「백설白雪」 전문
짧은 두 문장, 네 행, 네 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물아일체의 문맥으로 읽히게 한다는 점에서 「동맥冬麥」과 같은 맥락에 놓인다. 다만 서정적 자아가 대상(세계)을 내부로 끌어들여 내적 인격화를 이루게 하는 동화同化 기법과는 달리, 화자의 감정이입으로 자아와 세계(대상)가 일체를 이루도록 하는 투사 기법이 끌어들여지고 자기성찰에 무게를 실린다는 점이 변별된다.
세상이 순결하지 않듯이 화자도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전제 때문일까. 시인은 '세상=나'라는 등식을 통해 '지움'의 미덕에 마음눈을 가져간다. 눈이 내려 세상을 하얗게 지우듯이(덮듯이) 화자도 그 눈으로 지워지고 순결하게 거듭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게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는 백설을 매개로 '지워짐→거듭남'이라는 명제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심산 김창숙金昌淑」과 「독도는 섬이 아니다」의 경우는 그 특유의 신선한 발상과 상상력으로 소중한 향토나 향토가 배출한 인물과 우리 국토(자연)에 대한 예찬이라 할 수 있다.
경상북도 성주에는 가야산이 있고
가야산보다
더 높고
깊은
심산心山
김창숙 옹이 있다
ㅡ 「심산 김창숙金昌淑」 전문
푸른 동해에
낙관한
삼천리
금수강산
대한민국의
국새國璽이다
ㅡ 「독도는 섬이 아니다」 전문
「심산 김창숙金昌淑」은 경북 성주 출신의 고매한 인물인 김창숙을 우러러 떠받드는 시다. 감창숙의 호인 '심산'에 착안한 듯한 이 시는 향토에 대한 자긍심을 바탕으로 높고 깊은 자연으로서의 산(가야산)보다 더 높고 깊은 이데아로서의 산(심산, 心山)을 칭송하고 일깨워준다고 할 수 있다.
「독도는 섬이 아니다」는 우리 국토를 그림(한국화나 문인화)에 대입시켜(비유해) 독도가 '삼천리금수강산'(대한민국)의 작은 섬이 아니라 '푸른 동해'에 찍어놓은 '낙관落款'이자 '국새國璽' 자체로 환치해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환기하고 있다. 낙관은 작가가 그림이나 글씨를 완성했을 때 마지막으로 찍는 인장이며, 국새는 국가적 문서에 사용하는 인장으로 국권國權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비유의 뉘앙스가 쉽게 다가올 것이다.
박방희 시인은 푸른문학상, 새벗문학상, 불교아동문학작가상, 방정환문학상, 우리나라좋은동시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사)한국시조시인협회상(신인상), 금복문화상(문학부문), 유심작품상(시조부문)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나무 다비茶毘' 외 동시집, 시조집, 등 27권의 작품집이 있다. 112쪽,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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