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교수의 역사와의 대화] 세종, 출산 휴가를 부여하다

입력 2020-01-20 18:00:00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최근 조카가 아이를 출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았다. 요즘처럼 출산율이 떨어지는 시대에 큰일을 했다며 아낌없는 축하를 해 주었다. 조카의 남편은 출산 휴가를 받아서, 아내의 산후 조리를 지원해 주고 있었다. 조카와 그 남편에게, 출산 휴가를 부여한 원조가 세종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금부터 거의 600년 전에 관청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출산 후에도 일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출산 휴가를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도록 했다. 『세종실록』의 1426년(세종 8) 4월 17일의 기록에는 "형조에서 전지(傳旨)하기를, 경외공처(京外公處)의 비자(婢子)가 아이를 낳으면 휴가를 100일 동안 주게 하고, 이를 일정한 규정으로 삼게 하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100일 동안의 출산 휴가를 지시한 내용으로 세종의 의지가 정책으로 구현된 것이다. 비자(婢子)는 조선시대 여성 노비들을 지칭하는데, '노비'는 남자 종인 노(奴)와 여자 종인 비(婢)를 합한 용어이다.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 여성들은 직업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관청에서 일하는 여성 대부분은 노비의 신분이었다. 그래서 노비 여성의 휴가 규정을 만든 것이다.

세종은 출산 한 달 전에 미리 휴가를 쓸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옛적에 관가의 노비에 대하여 아이를 낳을 때에는 반드시 출산하고 나서 7일 이후에 복무하게 하였다. 이것은 아이를 버려두고 복무하면 어린아이가 해롭게 될까봐 염려한 것이다. 일찍 100일간의 휴가를 더 주게 하였다. 그러나 산기에 임박하여 복무하였다가 몸이 지치면 곧 미처 집에까지 가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다.

"만일 산기에 임하여 1개월간의 복무를 면제하여 주면 어떻겠는가. 상정소(詳定所)에 명하여 이에 대한 법을 제정하게 하라"는 1430년(세종 12) 10월 19일의 기록에서는 현실에 맞게 출산 여성들에게 휴가를 쓸 수 있도록 한 세종의 배려를 읽어 볼 수가 있다. 1434년(세종 16) 4월 26일에는 아내의 출산을 도와야 하는 남편에게도 휴가를 부여하라는 세종의 지시가 기록되어 있다.

중앙과 지방의 여성들이 아이를 배어 산삭(産朔)에 임한 자와 산후(産後) 100일 안에 있는 자는 사역(使役)을 시키지 말라 함은 일찍이 법으로 세웠으나, 그 남편에게는 전연 휴가를 주지 아니하고 그전대로 구실을 하게 하여 산모를 구호할 수 없게 되니, 한갓 부부가 서로 구원하는 뜻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 때문에 혹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어 진실로 가엾다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사역인(使役人)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구실을 하게 하라"고 한 내용이 그것이다. 출산 여성의 남편에게도 휴가를 부여하여 아내를 돕게 한 세종의 조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시대를 앞서간 탁월한 정책이었다. 세종 시대에 그 틀을 완성한 출산 휴가 규정은 성종 때에 완성한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 아예 법으로 확립되었다.

『경국대전』의 형전에는 "입역(入役)하고 있는 비(婢)는 산기(産期)를 당하여 30일, 산후에 50일 휴가를 준다. 그 남편은 산후에 휴가 15일을 준다"고 규정하여, 출산 여성에게는 80일의 휴가를, 남편에게는 15일의 휴가를 보장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 서문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세종은 자주, 민본, 실용이라는 시대정신을 표방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간 왕이었다. 사회적 약자인 천민 여성들에 대한 배려 정책으로 출산 휴가 정책을 처음 실시했고, 이것이 조선의 헌법에까지 기록된 점은 현재에도 큰 의미를 주고 있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널리 유행했던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2020년의 오늘. 저출산 문제는 21세기 한국사회가 당면한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다. 세종이 600년 전에 선구적으로 취했던 출산 장려 정책을 발전적으로 계승해 나갈 수 있는 적절한 방안들이 수립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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